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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밤

 

 

 비가 내린다. 아직 꽃망울만 망울망울 맺힌 나뭇가지에선 기대하던 만큼의 꽃향기는 나지 않았다. 다만 어느 순간 후드득 내민 손바닥 안으로 물방울은 떨구었을 뿐. 시원하고 간지러운 감촉에 살짝 어깨를 모았다가 다시 풀었다. 머리카락이며 눈꺼풀, 목덜미에 드문드문 물기가 묻어간다. 이 곳에서 제일 키가 큰 나무 밑둥에 앉아 비를 피하는데도 나무가 채 빗물을 거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치 비의 양이 점차로 늘어간다. 나는 한 뼘 앞의 땅이 진하게 젖어드는 것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빗소리가 귓바퀴를 돌아 문득 내뱉은 숨소리와 만난다. 그렇게 들릴 리 없는 작은 메아리를 듣는다. 물웅덩이 고이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보지 않아도 그 수도 없이 춤추고 있을 타원형의 일렁임을 손바닥을 도화지 삼아, 다른 손의 검지를 흑연 삼아 스케치할 수 있다. 조금 멀리서 천둥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 순간, 빗물이 내 입술 가운데로 머금어진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나는 다시 한 번 마지막을 떠올린다. 불가항력. 어쩔 수 없이 빗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은 너를 향한 중력. 나는 너의 입술색만은 아직도 기억하는 까닭이다. 아주 사소한 자극에 그새 다시 떠오르는 너의 피어오르는 추억은 비 오는 날의 한기(寒氣)보다 현실적이다. 그렇게 네 입술만 기억할라치면 어느새 나는 내 등 뒤에 다가온 너와의 수많은 것들이 닿아옴을 인지한다. 너는 떠났으나 그렇게 너의 것들은 아직 내 체온처럼 나에게 들러붙어있다. 사람이 숨을 쉬는 한 체온은 당연한 것이다. 내가 숨을 쉬는 한, 너의 흔적은 당연히 남아있는 걸까. 그렇게 나는 다시 너를 떠올린다. 빗소리가 조금 아득해진다.

 

 

 네가 가던 날도 이리 밤이었다. 우리는 밤에 헤어졌지, 그러나 평소 너는 밤하늘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내게 말하곤 했다. 별자리를 제법 너는 외우고 다녔다. 영 별하늘에서 네가 말하는 지도를 찾지 못하던 나였지만. 자신만만하던 별밤의 그 가이드는 결국에는 보다못해 길치인 내 손을 붙잡고 별을 가리켜야 했다. 그러면 세 번에 한 번 꼴로 나는 간신히 너와 함께 그 별에 도착했다. 그러나 사실 별을 찾아내든 말든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가만히 나무 등치에 앉아, 혹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우리는 어깨를 맞댔다. 밤바람은 대부분 선선했다. 너는 가만히 내 손을 잡아왔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는 사람을 안정시켰다. 가끔 그대로 나는 먼저 너에게 손가락을 얽고, 가끔 그대로 너는 먼저 나에게 입술을 맞대어 왔다. 꽃나무 아래에서 당신과 나는 매 순간마다 연인이었다. 너의 따스한 눈빛.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정말로.

 우리는 서로가 더없이 애틋했다.  

 늘 함께 하자고, 무언으로도 유언으로도 나날이 약속을 덧대듯이 나누었을 뿐.

 

 

  당신이 떠난 후의 날짜는 세지 않았다. 당신과 사랑할 때의 날짜는 기쁘게 헤아릴 것이었지만, 헤어진 후의 날짜는 이 세상 아무도 헤아리려 들지 않기에 나도 헤아리지 않았다. 그러나 매번 추억은 나에게 너 대신 내려왔다. 비가 오지 않는 밤에도 너는 비를 부르는 존재였다. 비가 내리면 너의 마지막도 내 눈 앞에 살붓 나렸다. 네가 떠나는 날밤에도 너의 입술색은 고왔다. 미울 만큼 고와서, 미워할 수 없던 고운 사람. 마음은 거세진다. 지는 듯 하다가도, 고개를 떨굴 듯 하다가도, 다시 싹이 트고, 그저 너를, 향했다, 너는, 너무, 향, 이, 짙, 어서...  그러나, 

 

 

 "너도 나를 기억할 것을 알아."

 

 

아무리 노력해도 소중해서 더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여.

사랑은 꽃비가 내려도 차마 지지 않고,

그렇게 오두커니 비가 오는 봄날이면, 너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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