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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햇빛도 들지 않는 곳에 오래 있다보면 시간감각이 흩어질 때가 있었다. 작업할 분량이 많을수록 그랬다. 남자는 의미 모를 숨을 삼키고는 잘 벼린 나이프를 다시 가죽 칼집에 쑤셔 넣었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사슴은 가죽도 다 벗겨진 채였다. 몇 개 덜어낸 뼈들이 테이블 위에 얹은 포대기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것을 어렵지 않게 돌돌 말아서 한 쪽에 치워 두었다. 사슴의 뿔은 상하지 않게 벽에 잠시 기대어 두고, 발굽 따위도 잘 빼어 얹어져 있었다. 이제 이 다음, 어떻게 할 것인지 주인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번거롭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긴 했다.


  남자는 비밀 지하실에 있는 여러 문 중 하나를 골라 계단을 타고 올랐다. 어둑한 곳이었지만, 텁텁한 먼지 냄새는 나지 않았다. 큼, 하고 막힌 기침이 나왔다.
  
  병에 걸려 나날이 죽어가고 있는 현 영주는 남자에게 성의 비밀이란 비밀은 모조리 알려 주었고, 그것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필요에 따른 성의였다. 영주는 아름다운 겉껍질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내부는 흐물흐물 녹다만 촛농처럼 허약했다. 이름만 영주였지, 직권이나 높은 자의 의무는 전부 전 영주가 지고 있었다. 참 편리한 구조였다.

  
  "…아."


  계단을 올라 문을 열자, 창고로 쓰이는 빈 방으로 이어졌다. 남자는 거기서 다시 복도로 나갔고, 꽃바구니를 들고 있는 어린 시종과 마주쳤다. 남자는 성 안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있고 쏘다니는지 알지는 못했지만, 종종 그들과 마주칠 때가 있긴 했다. 얼굴이 낮익지 않은 걸 보니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신참인게 분명한 그 솜털이, 이상한 소문이라도 들었는지 겁을 먹고 빌빌 거렸다.


  "영주님께 가시는 길입니까?"
  "! 네, 네에…."


  영주가 오직 가까이 하는 사람이라곤 남자 한 명 정도였다. 그녀의 까다로운 성미와 바라는 조건들은 그만이 안다는 얘기였다.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나서서 그 모든 것들을 해명할 바에야 잊혀질 때 까지 지하실에 쳐박혀 있는 게 훨씬 나은 성미다 보니 입을 다물 뿐이었지.
  사람들은 그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 비밀스럽게 꾸며 대었고, 저마다 다른 오해들을 하고 있었다. 아마 그 점에 대해선 영주도 잘 알고 있을 테였다. 어쩌면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제가 대신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가는 길이었으니까요."
  "응? 아니, 저…."
  "괜찮습니다. 시종장님께, 제 얘기를 하면 이해해주실테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여, 여기…. 부탁드려요……."


  남자는 팔에 꽃바구니를 걸고는 영주의 방으로 향했다. 가죽을 잘 벗겨내는 칼, 상하지 않게 발라두는 기름병의 주인에게.


  "실례합니다."
  "어머나, 종달새가 오려니 했는데. 사슴이 들다니 길을 마주치기라도 했니?"
  "그렇습니다."
  "응, 어서 들어오렴."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느낀 건 쓴 약 냄새였다. 그리고 비릿한 피 내음. 언제부터인가 영주는 주위에 그런 쓰고 비린 냄새를 남기고 있었다. 시들어서 나날이 앙상해져가는 손의 이미지 그대로였다. 그리곤, 점점 더 집착적으로 향물이며 꽃송이 따위를 주위에 끌어 들이는.

  어쩌면 이게 죽기 직전 누구나 하는 발작의 순간일까.
  남자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꽃 바구니를 그녀에게 안겨주었다. 부드러운 소재로 만든 잠옷을 입고 있던 영주가 기쁘게 웃었다. 이제 안심이라는 듯이.

 


   2.

 

  그녀는 언제나 나쁜 비밀만을 남자에게 먹였다. 새로운 시도일 때도 있었고, 헌 이론의 증명일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영주를 보고 마녀의 기질이 있는 것이 아닌가 수근거리곤 했는데, 남자는 그 소문이 영 틀린 것만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 계통이 조금 달라 영주는 신비나 미지를 머리로 이해하고 싶어하곤 했다. 가슴으로 느끼고 감탄하는 걸로 끝나면 무엇보다 미적지근하게 여기는 여자. 남자는 전 영주도, 그의 가신도 아닌 그녀의 말만 들었다.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녀와 악마의 기질을 타고났지만,


  "저……."
  "아, 죄송합니다. 제가 길을 막았나요."
  "아뇨. 아뇨. …그, 영주님께 손님이 찾아왔다고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간단한 거라면 굳이 얼굴 보지 않아도 그쪽에서 해주신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 으음…. 아마, 들으시면 직접 만나려고 하실거예요! 부, 부탁드려요. 저 아직 직접 말씀드릴 자신이……."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남자는 잠시 눈만 깜빡이다가, 알겠습니다, 하고 짤막하게 대꾸하곤 다시 영주의 방을 두드렸다.

 


   3.

 

   그것은 인어라 불렸다.
   상반신은 여인, 하반신은 바닷 생물의 지느러미. 존재한다는 말은 책에서나 나왔었으니, 그것이 발견되었다는 제보자의 말이 있어도 바로 반응하기 힘들었다.


  "영주님. 영지에 나고 자란 것, 머무는 것들은 다…. 영주님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늙은이가 기쁜 마음에 이것을 영주님께 바치고자 합니다."


  바닥에 납작 업드린 이는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짠 바다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아마 그 꼴로 영주님 앞에 내보일 수 없다는 의례와 형식의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벽에 기대어 늙은이를 보다가 영주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그저 웃는 얼굴이었다.


  "그래, 그럼…. 한 번 보여주겠나?"
  "네. 당연한 말씀입죠."


  커다란 통 아래에 끌기 쉽도록 바퀴가 달려져 있는 조악한 물건이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한 순간에 그것으로 쏠렸다. 늙은이는 여전히 고개를 땅에 박고 들지 않고 있는 채였다. 영주가 남자에게 손짓해보였다. 비밀을 다룰 땐 늘 그렇듯, 이 방엔 늙은이와 영주, 남자. 셋 밖에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는 미리 준비해둔 얇은 장갑을 손에 끼고는 통을 향해 다가갔다.


  "보내는 성의엔 감사할 일이야. 선물을 믿고 바로 받아들이지 못해 미안하네."
  "아니올시다! 옳으신 일입니다! 어서 확인하시고, 그 놀라운 것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후후. 벌써 기대가 되네."


  남자는 통 위에 덮은 천을 걷어내었다.


  "……"


  반은 거짓말이거나, 제대로 꿰어 붙은 모조품을 바쳐놓고 자랑을 늘어놓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재갈이 물려 있는 그것은 얌전하게 몸을 누이고 있었다. 늙은이가 말하길, 몸에 해롭지 않은 마취제를 발라 놓았다고 했다. 남자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직접 손을 넣어 그것의 하반신을 더듬었다. 신중하게 연결부와 비늘 따위를 손으로 세어보던 남자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젖은 장갑을 벗었다. 영주는 뚫어져라 자신 쪽을 보고 있었다.


  "…진품같아 보입니다."

 


   4.

 

  "그럼, 정말로 인어라는 게 물속에서만 사는 생물인지 확인해보고 싶어."
  "네."


  인어라는 종은 얼마나 섬세한 신경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과하게 받은 스트레스로 꼴깍 죽어버릴 정도는 아닐거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혹시 모르니 남자는 최대한 준비해보기로 했다. 인어를 물 밖에 길게 눕혀놓은 다음, 남자는 제 창고에 있는 질 좋은 수면 마취약을 떠올렸다. 작고 동그란 붉은 열매를 하나 하나 일일이 으깨어 즙을 내고 그 뭉개진 껍질을 넣고 이것 저것 섞어 굳힌 연고는 단 향이 풍겼다. 아낌없이 그 몸에 펴 바르고, 조명은 살짝 어둡다 느낄 정도로 조정했다. 끈적한 연고 덕분에 몸에 있었던 수분까지도 곧 말라 의미가 없을 거였다.


  "……ㅡ."


  인어는 아무런 신음도, 비틀림도 보이지 않았다. 영주는 흐뭇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고, 청년은 무심코, 이 것도 곧 죽겠구나. 하고 예상했다. 구석에서 가만히 관찰하던 그가 해체용 톱을 집어 들었다. 무언가 큰 고깃덩어리를 썰기엔 이만한 게 없었다.

  
  "아무래도, 몸에 물기가 없으면 곧 죽을 것 같습니다. 숨도 그렇고, 반응자체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만, 방치할까요?"


  색부터가 어둡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비늘이 탁하게 거스름해지는 걸 손으로 가볍게 훑어보고는, 생물의 숨을 알아보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차차 가물어지는 숨소리. 이대로 두면 곧 죽어버릴 목숨에서 나는 소리였다. 영주는 시계를 보며, 무언가를 셈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다시 물에 넣어둬."
  "……?"


  네, 그럼 팔부터 자를까요…. 따위를 대꾸하려던 입이 꾹 다물렸다.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영주는 여전히 즐거운 낯이었다. 축 쳐져 있는 인어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손에 꽉 쥐고 있는 것의 무게를 새삼 느끼며, 청년은 해체용 톱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인어를 품에 안아 새로 물을 받아둔 욕조에 담궜다. 바싹 마른 흙에 물을 주는 기분이었다.

  청년은 인어의 눈가리개와 재갈을 모두 풀고, 오래 묶여있었던 만큼 아플 것 같으니 가벼운 턱 마사지를 했다. 그리고는 직접 인어의 턱을 붙들고 입을 벌리게 한 후, 엄지 손가락으로 혀를 꾹 눌렀다. 점점 수분을 먹은 비늘이 원래의 색을 찾는 동안, 그 눈꺼풀이 한 번 푸르르 떨렸다. 연고의 효력도 거의 사라질 즈음 물에 넣으니 남은 것도 씻겨 나가는 모양이었다. 청년은 그 생물의 가치나 특성을 알아내기 위해 이리저리 살피듯 건드리고, 어루만지고, 들여다 보았다.

  으음, 하고 작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잘 가르치면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머나."
  "방금 발성이…. ……혀구조도 인간이랑 그리 다를 바 없고요."


  인어의, 후들후들 떨리던 몸이 이제야 완연히 매끄러워졌다. 반들거리는 밀랍색의 피부. 조심스럽게 눈을 뜨는 인어의 눈은 무척 검었고, 지금까지 생사에서 헤맨 것 치고는 꽤나 태평해 보였다. 몽롱하게 꿈에서 깬 표정으로 허공을 보는 시선이 점차 맑아지고 있었다.
  아주 약해빠진 개구리 수준은 아닌 모양이었다.

  또 영문 모를 생각을 하고 있을게 뻔한 영주가 만족스러운듯 품의 꽃바구니에서 한 송이 꽃을 빼어 인어의 귓가에 꽂았다. 바로 오늘 아침 꺾어다가 바쳤을 게 뻔한 싱싱한 꽃이었다. 물의 것에게 땅의 것으로 꾸며주자니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이상했다. 청년은 무심코, 이 가련한 생물이 영주의 마음에 들어 버렸음을 알아챘다.

 


   5.

 

  그 호기심과 탐구심은 죄악과 같았다.

  청년은 영주의 명령으로 인해 한동안은 인어에게만 집중하게 되었다. 쇠비린내엔 익숙하지만, 물비린내엔 영 어색했다. 서로 엮여서 뭉친 덩어리같은, 붉은 냄새와는 그 성질이 달랐다.

   영주는 인어가 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더 깊고 넓은 욕조를 마련해 주었고, 청년은 인어에게 가장 적합한 게 무엇일지 한참을 지켜보게 되었다. 조명의 빛, 습기, 주위에 얹은 물건과 향. 먹을 것에 대한 취향까지. 인어의 방은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졌고, 눈으로 보고 익숙해지라는 의미에서 남자는 인어와 꽤 오랜 시간을 늘 같이 있었다.

 


   「답지 않으시네요.」
  「아니, 곧 알게 될거야. 이게 너무 나다운 일이라는걸?」

 


  영주는 인어에게 인간의 언어를 조금이라도 가르치라 일렀다. 그런 것 자신 없는데요, 하고 일러도 그저 속모를 웃음만 짓고 끝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청년은 그것에게 글자를 하나씩 보여주고, 따라할 때 까지 발음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존대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말을 낮춰서 꺼냈다. 처음엔 대체 뭐하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던 그걸 볼 때 마다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한 번 시작하자 진도는 놀랄만큼 빨랐다. 기분이 나빠질 정도였다.


  건네준 열매를 조심스럽게 오물거리며 인어가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 사람."
  "…? 뭐라고?"
  "그 사람. 누구?"
  "……."


  인어가 욕조 끝을 두 손으로 살짝 붙들었다. 생각보다 근력이 있는 편이라, 위험할지도 모른다 싶어서 먹이는 것마다 힘을 저하시키는 약을 섞어서 먹이곤 했다. 완전한 사육이었다.
  그리고, 저것이 말하는 것이 누구인지, 청년은 금방 알아챘다.


  "그녀는…."


  영주라고 말해봐야, 영지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인어에겐 무리였다.


  "나를 기르고 있어."
  "……. 가축?"
  "기르는 동물을 가축이라고 하지. 똑똑하네."


  칭찬과 꾸짖음을 구별할 수 있게 된 인어가 기쁜 듯 참방였다. 청년은 습관대로, 그녀에게 상을 내리기 위해 하나의 열매를 더 건넸다.
  

  "좋아하는 사람?"


  씹어먹던 중, 과즙이 흐르는 것을 손으로 훑은 인어가 말했다.


  "……."


  굳이 답할 의무는 없었다. 청년은 입을 다물었고, 인어는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6.

 

  남자는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쓸 줄도 알았다. 예의범절은 물론이거니와 상대를 에스코트를 하는 법, 춤을 출 때 어떻게 잡아야 상대에게 안정적인 기분이 들게 하는지에 대한 요령까지도.

  영주의 방은 푹신한 소재로 되어 있어서 한 밤중에 맨발로 왈츠를 추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혹여나 눈 앞의 남자가 제 발을 밟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듯, 잠옷 차림의 영주는 사뿐 사뿐 움직였다.


  "아버지는 제가 완벽하시길 바랐거든요."
  "시시한 이야기네."
  "제가 그렇듯이요."


  옛날, 옛날, 한 소년이 살았다. 그에게는 위로 두 명의 형제가 있었고.


  "그를 존경했어?"
  "제 나름대로는."


  그 아버지는 작위도 재산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걸 바라는 야망찬 사람이었다. 젊었을 적 사랑을 두고 벌인 결투에서 크게 패한 이후 다리를 다친 만큼 그 청렴결백함에도 흠이 나버린 모양이었다.

  그 피를 분명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귀찮아 하고, 어디에 써먹으려고 쳐도 써먹을 길이 없는 구제불능이었다. 그저 시키는대로만 네, 네, 하고 대답하는 샌님. 딱 그 정도의 평가를 받았다. 소년은 높은 자리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기술자들의 기술을 신기하게 여기고, 제 몸을 재산으로 하여 뭔가를 하는 사람들에게 흥미를 느끼곤 했다. 다행히 위에 있는 형들은 적당히 욕심많은 속물이었던지라, 소년은 그들이 바라던대로 영지의 사냥꾼들이나 해체업자, 상인들을 가까이 하며 지냈다. 그래서 목숨은 건졌다.


  "그의 꿈을 종종 꿔?"


  겉돌았기 때문에 소년은 제 형들와 아버지가 뭘 생각하는지 몰랐다. 아마 이 사실은 평생 소년의 변명거리가 될 중요한 사실이 될 것이다.


  "아니요."


  한 바퀴 빙글, 돌며 청년은 영주를 조금 더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오늘은 상태가 좋은지 꽃냄새가 옅었다.


  "네 손으로 죽였는데?"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미안, 돌려 말하는 게 편했어?"
  "기왕이면 아무 말도 안 해 주시는 게 편했을 것 같습니다."


  시대는 시대라, 아랫 사람이 세상을 뒤집으려다가 걸리면 목숨 여럿은 내어 놔야 하는 때였다.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걸렸는데, 한 번 들키자 온갖 세상이 박살나는 데엔 금방이었다. 
  원래라면 소년도 피를 이었다는 죄로 죽어야 마땅했겠지만, 친하게 지내던 천한 이들이 손수 가죽 포대를 바꿔치기 해주었다. 가파른 절벽에서 내던져진 가죽 포대 안에는 소년의 무게와 비슷하게 느껴질정도로 재어진 고기가 들어 있었다. 털퍽, 바위에 부딪치면서 나는 그 소리는 파도 소리에 가려 들리지도 않았을 테였다. 그날 떨어진 가죽 포대는 셋이었다. 소년이었어야 할 것과 두 형들.

  지옥같은 순간은 하루 이틀 지나서 낫는다는 게 아니라, 한 번 일어난 것으로 평생 지고 가야 했다.


  "게다가, 당신께서 시키셨잖아요."
  "맞아.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반역자의 피를 어떻게 믿겠니?"
  "비밀로 해주시는 건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재밌어 보였거든."
  "그 말도 안 하셨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영주는 살갑게 웃으며 스텝을 멈추고, 남자의 두 목을 끌어안으며 몸을 기댔다. 얇은 천 안의 부드러운 몸은 곧 깨질 거라도 된 듯 불안하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녀를 아이처럼 안은 남자가 뒤로 밀려나 침대에 털썩 앉았다. 남자의 시선이 하얀 침대 시트에 닿았다가, 다시 눈길을 돌렸다.


  "요즘 기분이 좋으시네요."
  "응. 티가 나는 모양이구나."
  "네, 무척이나."

  
  영주는 가만히 숨을 죽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도 그럴게, 오랜만이잖니?"
  "당신께서 그 생물을 제대로 기르기로 작정하신 이래로, 말이죠."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었거든. 저것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서. 재미있지 뭐야."


  그리고는 책장으로 다가가 한 권의 책을 뽑아다 남자에게 건넸다. 꽤나 묵직한 그것을 받아든 남자는 영주를 올려다 보던 시선을 내려 책을 건드렸다. 낙엽을 잘 말려 만든 책갈피가 눈에 띄었다. 남자는 책을 펼쳤다. 인어에 대한 것들. 그것의 고기를 입에 댄다면, 그것의 눈물에 닿는다면, 그것의 피에 닿는다면, 등등. 영생과 저주에 관한 가설들과 추측이 사실처럼 쓰여 있었다.

 


   7.

 


  "나는 그 걸 먹을거야."
  "그 유언도 들을거고."
  "네가 바란다면, 네 몫의 그릇 정도는 준비해줄게."

 


   8.

 

  차오르는 속도가 빠른 파도 같았다.


  인어의 손은 인간의 피부와는 달리 얇고 사이마다 막이 덮여 있었다. 걸맞게 잘 진화했거나, 아니면 되다 만 덩어리처럼 보였다.
   남자는 늘 욕조 옆 의자에 앉았다. 친밀함은 거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는 진부한 글 문구 탓이었다. 그 목소리는 단조로운 톤에, 감정을 실을 줄도 몰랐지만, 책 한 권을 다 읽어줄 때 까지 인어는 계속 조르듯이 옆에 앉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끝났어."
  "……. ㅡ."


  인어가 입을 열고 한 단어를 발음했다.
  청년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생소할 정도로. 이 세상에 이제 그 단어를 입에 담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어서.


  "…어디서 들었어?"
  "처음 만났을 때."
  "처음…. ……들렸어?"
  "누가, ㅡ하고 말했어. 그러니까 누가 나 만졌어. 너라고 생각해."
  "……."


  남자는 애매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인어가 욕조에 몸을 기대며 웅얼거렸다. 분명 발음은 인간과 거의 흡사했지만, 쌕쌕하고 빠지는 소리도 섞일 수 밖에 없었다. 걸맞게 진화했거나, 아니면 되다 만 덩어리거나.


  "너를 본 적이 있어."
  

  그러고보니, 인어는 머리카락이 잘 자라지 않았다. 스스로 자르거나 할 것 같지 않으니 일정한 길이에서 멈추는 걸까.


  "다른가? 비슷한 네가 둘이 있었어. 바다, 에."
  "……."
  "내가 봤어."
  "…하아."
  "움직이지 않는 가죽, 에? 를? 먹혀 있었어."
  
  
  슬슬 머리가 지끈거렸다. 남자는 그 멍청한 생물이 지껄이는 걸 그만두게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영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응?"
  "그것들을 어떻게 했는데?"


  두 형들은 가죽 포대에 넣어져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정말 죽었는지 확인하진 못했지만,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도는 없었을 것이다. 천한 이들도 자신만 겨우 빼돌렸다고 했다. 사실, 그들에겐 거만한 형들을 구할 이유도 가치도 없었을 거였다. 그걸 알았기에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사실, 슬프지도 않았다.


  "먼저 먹은 거. 움직이지 않았다. 뜯었어."
  "혼자서?"
  "우리들 여럿."
  "인어는 너 혼자가 아니란 소리네…."
  "그리고,"


  그럴거라면 처음부터 그들의 이야기들을 양피지에 적어 영주에게 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나도 먼저 먹은 것 처럼, 그랬어."


  남자가 인어를 말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끝내 한 문장을 입에 담았다. 남자는 눈을 깜빡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 숙여 인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흔치 않은 변덕 치고는 드문 표현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심장 속에 여러가지의 감정이나 옛 생각 같은 것들이 엉켜서 엉망인 기분이었다. 그래, 그 곳도 바다였지. 바다에서 온 것이니 그럴수도 있었을 것이다. 소름끼칠정도로 끔찍한 생물이었다. 이걸 아마 내 손으로 죽이게 되겠지.


  "너도 그 사람도…. 비린내가 나."
  "그 여자만큼?"
  "종류가 다를 뿐. 비슷해."
  "서러워."
  "그건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9.

 

  어쩌면 남자는 자신이 생에 별 관심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가치도 흥미도 없어서 식은 죽 같다는 고정 관념에 박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달이 몇 번이나 떠올랐다. 이런 시시콜콜한 일을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는지도 모른채, 계속 명령대로 인어를 가르쳤다. 그것은 점차 영리해졌고,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떼도 쓸 줄 알았고, 먹히지 않으면 우는 척 하기도 했다. 사람까지 가려 대하는 게 노골적으로 변해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 잠시 숨어 있다가 고개를 내밀곤 했다.

  그날따라 오래 오래 얼굴을 보이지 않아서, 이상하다는 얼굴로 남자가 문을 닫고 걸어왔다. 심부름으로 인해 며칠간 성을 비웠다가 돌아온 참이었다. 그 동안 관리를 영주가 직접 하겠다고 했는데, 그새 굶겨 죽인건가…싶은 때에 그것이 머리를 들었다.


  "ㅡ가 다녀갔어."
  "……."


  며칠이나 지난 건지 알 수 없는 화관이 씌워져 있었다. 여러 색의, 큰 꽃들이 얼기설기 엮여 있는 것을 얹고 있는 모습은 솔직히 악취미에 가까웠다.


  "ㅡ…."


  인어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날 싫어해. 그런데, 난 그녀 앞에서 말 제대로 안 해."
  "바다로 놔줄까?"
  "?"
  "돌려보내줄까?"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남자가 차분하게 발음했다. 인어는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찡그리듯이 웃었다. 그렇게까지 복합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해? 못할 거면서."
  "……."
  "난 잡혔잖아. 너희들에게."
  "생각보다, 더,"
  "난 죽을거잖아?"
   "끔찍하네."


   남자는 욕조 옆에 높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화관을 쓴 인어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10.

 

  소년은 형들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소년이 기이했기 때문이었다. 잘못 날다 부딪쳐 땅에 떨어진 새의 날개를 살펴보고, 수술을 시켜주려고 했다가 들켰기도 했고, 죽은 짐승을 해체하는 일을 시험해보다가 내장을 잘못 찔러 피를 철철 쏟게 한 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 무슨 잔인한 짓이냐며 치를 떨며 손가락질하고, 철저하게 벌로서 다스리려 했다.

  인간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건 그것이 꽤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는 지능이 있기 때문이지만, 그렇다면 죽은 짐승은? 조금은 탐구심을 위해 움직여도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이런 얘기를 했다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는 성직자를 본 건 충격적인 일이었기에 소년도 스스로 조용히 있기로 했다. 피를 직접 손에 만지는 일은 더러운 것이라 생각되던 때였다.


  "영주가 잠시 들린다는데. 좋은 기회야. 마녀에게 홀려서 결혼까지 하다니. 정말 미쳐버린게 틀림없다고."
  "들었나? 그 딸이라고 하나 있는 게 온 몸에 병이라 골골거린다며. 후사도 그 모양으로 해놨으니, 이거야 원. 제 발로 굴러들어왔군. 그럼 이 참에……."
  "그 어미되는 마녀는 딸을 낳다 제풀에 죽어서 다행이지. 천운일세. 자, 들키지 않게……. 환영의 의미로 사냥을 열고 그걸 이용……."
  "아니, 어차피 이렇게 된거 그냥, ……."


  한 소녀가 그들의 땅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영주가 오냐 오냐 하는 외동딸로, 바다가 보고 싶다는 한 마디 말로 인해 잠시 들리게 된 거란다. 물론 소년은 큰 관심이 없었지만, 나이대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말친구가 되라며 끌려갔었다. 말이 그렇지, 영주 자리를 맡고 있는 중년의 남자를 죽이려 드는데 방해가 되니 치운 것에 가깝겠지만.

  왜 죽은 동물은 안 되는데, 산 사람을 죽이려는 게 되는건지 소년은 몰랐다.


  "……필요없는데. 적당히 있다가 돌아가."
  "…사정이 있어서요. 그럼, 잠시만 신세지겠습니다."
  "그래……."


  병든 딸을 보물처럼 안고 지내는 영주도 이해가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소문대로 소녀는 갸날프기 짝이 없었고, 이런 일에 휘말려 죽기엔 불쌍해 보였다.


  "도망치게 해줄까요?"
  "……. 무슨 말이야?"
  "곧 죽을거니까. 당신도 그도."


  그 곳은 요양을 위해 만들어진 오두막으로, 파도 소리가 잘 들리는 곳이었다.
  아주 잠시, 지금까지 한 번도 눈길 하나 주지 않던 소녀가 웃었다.


  "죽는 건 바라는 일이지만, 그런 방식은 별로 인 것 같아."
  "…그런가. 안됐네요."
  "살려줄까?"
  

  잘못 들은건가? 소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아버지한테 이 사실을 말할테니까. 적당히, 네가 자백했으니 죄가 가볍다…정도로? 넌 도망가던가."
  "이렇게 나오면, 내가 당신을 입막음 할 거라는 생각은 안드나요?"
  "응."
  "왜?"
  "너, 그 사람들 다 싫어하지? 상관 없잖아. 이참에 자유로워지면 좋기야 하겠네."


  이 아이, 혹시나 마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아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녀가 눈을 감았다. 곧 잘 것 처럼 자세를 고치고는, 숨을 편하게 쉬었다.


  "넌 느릴테니, 부지런히 도망쳐야겠구나. 곧 잡히겠지만."
  "……."
  "바보구나. 그는 이미 다 알고 있는걸. 너흰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어. 쉬러 왔다고? 웃기네. 난 바다 냄새 싫어해. 그 비린내, 역겹거든."
  "그건…."
  "응. 그리고 너도 역시 그 아들이라 굼뜨네. 얘기 즐거웠단다."


  문을 박차고 누군가가 들이닥쳐 소년을 잡아 바닥에 짓눌렀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눈 앞이 번쩍였다. 억지로 꺾여 뒤로 묶인 손목이 아프다고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억지로 세워졌다. 아, 그렇군.

  역시 산 사람을 죽이려 하는 것도 안되는 거 맞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소녀가 가엾어서, 라기 보다는 그것밖에 할 수 없었으므로 지푸라기를 잡은 거나 다름없었다. 죽여 달라는 걸 곱게 바꿔 말한거나 다름 없었다. 뒤바뀐 가죽 포대 덕분에 목숨을 건진 소년이 기다시피 겨우 겨우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소녀가 있던 곳으로, 꽤 낡았고, 사유지 깊숙이에 비밀스럽게 지어진 것이라 그게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물론, 그곳에도 영주의 병사가 있을 수는 있었지만 거기가서도 들킨다면 포기할 뿐이었다.

  문을 열자 그 곳엔 누군가가 있었다. 흔들 의자에 앉은 소녀가 책을 들고는 읽고 있었다. 팔랑, 막 여유롭게 책장을 넘길 때였다. 이상하게도 비현실적이라 느껴져서, 소년은 우두커니 보고만 있었다. 소녀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쳐왔다.


  "살려줄까?"


  그때 이미 소년은 정말로 제 목숨이란 의미가 없는, 하잘 것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참 시시할 정도로 가볍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었다.

 


   11.

 

  그때처럼 침대에 누운 영주가 속삭였다. 바로 오늘이 좋겠구나.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먹을거니?"
  "…고려해보고 있습니다."
  "하여간, 미련 많은 남자는 싫더라."
  "유감이네요."

 


   12.

 

  남자는 필요한 도구들을 가져다 놓았다. 지느러미마다 진주를 박고, 등뼈를 타고 오르듯 등에 그림을 새기고, 손가락 뼈를 하나 하나 분리시키고. 그 외에도 주문 사항이 지나치게 많아서 외울 수 조차 없었다. 작업용 장갑을 끼고, 한참을 덜그럭거리니까 인어가 고개를 내밀었다. 물 비린내가 났다. 아니,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녀가 시켰어?"
  "…그래."
  "그녀가 날 죽이려 하는거지?"
  "맞아."
  "그녀가 미워."
  "……."


  남자가 해체용 톱을 들었다. 이것을 인어에게 쓰려면 차라리 그때 썼어야 했다.


  "난 밉지 않아?"


  인어가 희미하게 웃고는, 대답했다.


  "이제야 내게 그걸 물어보네."

 


   13.

  

  남자는 인어의 몸에 연고를 발랐다.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수면 마취제로 이번에 새로 장만해 놓은 것이었다. 영주는 그런 것을 명령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심부름을 수행하는 동안 만들어두느라 영 힘들었었다.
  
  밀랍색 몸에 꼼꼼하게 칠해주고 나자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인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남자는 인어의 머리를 제 가슴께에 기대게 하고는 한 팔로 감싸 안듯 눈을 가리고, 다른쪽 손으로 든 해체용 톱으로 지느러미에 길게 길게 상처를 남겼다. 물속이라 금방 금방 피가 새어나왔다. 영주는 인어를 작업할 때, 인간의 생 피를 넣어 담궈보라고 명령했지만, 그가 가져온 양동이엔 누구의 피도 없었다.


  "…아야……."
  "쉿……."
  "ㅡ…. 아파, 이거……."
  "아니야. 그냥, 그렇게 느껴지는 것 뿐이야."
  "……ㅡ."


  인어가 제 손 안에서 흐느꼈다. 눈물같은 것에 손이 젖어 보는 건 또 처음이었다. 남자는 욕조안의 물색이 바뀌는 것을 확인했다.


  "바다로,"
  "…잠 와……."
  "바다로 놔줄까?"
  "……."
  "…돌려 보내줄까?"
  "……심술쟁이."


  약기운이 도는지, 피가 빠져나가 어지러운건지, 인어의 몸에서 힘이 점점 풀렸다.


  "내가 죽으면, 내 심장은 꼭 네가 먹어줘."
  "왜. 먹으면 바로 죽는 부위야?"
  "내 고기. 그녀한테도 꼭 먹여줘. 심장은 안돼. 거긴 내 마음이 있거든."
  "…마음 같은 거, 너한텐 없어."
  "아냐, 있어."


  숨이 점점 약해졌다.


  "분, 명히. 있어……. 책이 말했어."


  점점.


  "…나, 너한테, 꽃, 냄새가 나는 거 싫었……."


  …….
  …유언을 들어야 했는데, 전할 만한 말이 없었다. 일부러 그녀에게 전하지 못하게 하려고 심술이라도 부린 것 같았다. 그냥 다 알려주지 말걸 그랬나. 꽃 냄새를 꽃 냄새라 하는지 모르고, 마음이 어떤 건지 모르고 죽었으면 쓸만한 말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증오한다, 거나, 원망한다, 거나. 그런 류의 말을 더 가르쳐야 했다.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슬슬 지쳤다. 그녀에게, 자신에게, 조금 더 빨리 찾아왔어야 하는 휴식이 슬슬 고달프게 느껴졌다. 남자는 영주가 죽음을 호소하고 있다는 걸 예감했다. 늘 정해진 궤도만을 걷던 이가 갑자기 하지도 않던 것에 애쓰는 척하고 있다면 뻔할 뻔자 아니었는가.

  


   14.

 

  남자는 소녀에게 거둬진 이후로 처음으로, 그녀의 명령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기념할 만한 일이라기엔 너무 늦었다.
  
  딱히 사랑하지도, 아끼지도, 기리지도 않는 관계였다.

 


  남자는 조리실로 들어갔다. 미리 마련해둔 재료들이 보였다. 테이블위에 쌓여있는 그것을 보다가, 남자는 빠져나오는 길에 있는 소각로로 향했다. 그리고는 가득 품에 끼고 있던 인어의 고기들을 불 속으로 집어 넣었다. 연하게 말캉거리던 고기 뭉치들에게 불이 붙었다. 익어가다못해 타들어갈 때까지. 부지깽이로 푹푹 찔러가며 그것을 밀어 넣었다. 화르륵, 화륵. 타는 것을 멍하게 보던 남자가 제 소매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꽃 향은 나지 않았다.

  따로 빼낸 그것의 심장은 맑은 물이 담긴 대야에 담궈둔 채로 계속 남겨 두었다. 입에 대기엔 입맛이 없었다. 고작 그 정도의 얘기였다.

 

  남자는 신비한 존재며, 기이한 법칙 따위는 믿지 않았다. 그러니 저 심장은 내내 입에 대지 않을 것이었다. 먼저 영주에게 그녀가 바라는 것들을 모두 대접한 후에, 여유가 있다면 조리실로 돌아올테지만 과연 청년이 걸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영주가 먹을 음식들을 담을 예정이었던 그릇은 모조리 텅 빈 채로 운반될 테였다. 딱, 하나. 제일 큰 그릇에만 인어의 머리를 놓았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웃으며 불투명한 푸드 커버로 그것을 가렸다.

 

  자, 이제. 주인의 소원을 이뤄드리자 했다. 더없이 재미없는 방식으로, 시시하게. 그동안 당신께서 밟은 피가 너무도 많았다. 싸구려 정의감은 아니었지만, 언제까지고 이어질 놀이는 아니었다. 당신께서 바라실 때에 건네는 걸로, 청년은 제 충성을 한 방울까지 다 짜내 증명하게 될 것이다.

  사실 남자는 아주 오래전에 죽었어야 했다. 그 인어에게 먹혀야 할 것은 자신의 살이었다. 죽은 채로 길게도 살아왔다.


  트레이에 그릇들을 다 실은 남자는 테이블에 잠시 올려둔 가죽 칼집. 잘 벼린 나이프를 집어들어 품에 숨겼다. 날이 잘 벼려져 가죽을 벗기기 쉬웠고, 살덩이를 자르면 씀뿍 잘려나가는 날이었다.

 

 

  이 모든 게 끝나면 자신은 바다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죽 포대에 담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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