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ritten by : Coltello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살아가는 것에 지쳐서 꿈을 꿔본 것은 아득한 기억 저편의 추억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고등학생 때는 공부와 수행평가에 지쳐 수마가 잔뜩 몸에 얽혀들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과제와 취업 준비에 잠깐 눈 붙이기도 아깝게 살았던 나이기에 수면 부족이 자연스레 잠깐의 쪽잠도 깊게 잠들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
물론, 꿈을 꾸는 게 좋은 수면 방법이 아닌 것은 안다. 얕은 잠을 잘 때 드문드문 올라오는 게 꿈이니까. 꿈을 꾸지 않고 깊게 잠드는 게 더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지만.
꿈 속에서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그러고 싶다고. 항상 그렇게 생각해버려서-. 언제였지? 한 번, 핸드폰 어플 중 루시드 드림을 꿀 수 있게 해준다는 걸 찾아 해봤지만 그대로 잠이 들어 또 실패하고 말았더랬다.
'인연'이라고 하기에도 어이가 없는 그 짧은 만남이었기에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너를 쫓게 되는 건 왜일까? 세 번째로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은 밤, 옥탑방 마루에 드러누워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습기를 끌어안은 초여름의 바람이 흐드러진다.
-그때 우리가 특별한 추억을 만들었나? 아니. 그저 호숫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나를 네가 지켜보기만 했는 걸. 내 마음에 와닿을 만한 대화를 했던가? 아니. 오고간 대화는 딱 하나, '노을이 지고 있어.' 라는 말이 전부였다. 시골의 호숫물처럼 맑고, 당시 내 나이 16살 또래로 보였으나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것 같은 청명한 목소리.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만큼, 운명적으로 네게 이끌려서. 그렇게 계속 그리고 있어.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슬슬 머리카락을 간질이던 바람과 도시의 희미한 매연 냄새, 차의 경적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조금만 자다가 들어가자. 조금만. 오늘도 너를 그리며 잠이 들어보려고 해.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11년 간의 바램이 무색하게도, 그렇게 오늘 꿈을 꾸었다.
하늘은 파스텔 핑크. 몽글한 솜까지 이어진 그 컬러가 봉제인형 같은 구름의 끄트머리도 같은 색으로 젖게 했다. 비가 왔다 갔을까, 길바닥에 고인 물들은 보랏빛 파아란 빛- 아니, 노란색? 온갖 것이 뒤섞인, 빛 담은 프리즘마냥 알록달록했다. 하늘을 향해 있으니 반사하는 대상은 저것일 텐데, 과학의 법칙도 무시할 줄은.
눈을 아무리 깜빡여도 이 환상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걸 자각몽이라고 하던가?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 헤엄치듯 앞뒤로 흔들어봤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바람, 구름, 어느새 나타나 하늘과 땅 사이를 헤엄치는 물고기들- 바쁘게 돌아다니는데 나만 가만히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다가와 입도 아니고 눈을 뻐끔거리며 날 바라보는 금붕어 한 마리를 검지로 꾹 밀어냈다. 순순히 밀려난 녀석이 가는 건, 있는지 눈치도 채지 못했던 큰 호수였다. 다른 웅덩이들은 자기만의 색을 빛내는데 그 호수만 기이하게 하늘을 온전히 담고 있었다. 본래 저것이 맞는데도, 이곳에 있으니 저게 가장 이상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한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호수의 건너편에서 너를 본 것 같아.
11년 만에 맛본 경이. 그 황홀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눈을 한 번 깜빡이니 모두 흩어져 버려서, 금방 현실로 돌아와야 했으니. 해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랜만에 꿈 속에서 만난 너는 11년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어. 빛나는 검은 눈동자도, 갈색으로 그을린 건강한 피부도, 꾹 눌러쓴 밀짚모자도. 만약 또 꿈을 꿀 수 있다면 바뀌지 않을까? 네가 자란 모습을 본다면 분명히.
마루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사람 몇 없는 전화번호부에서 할머니의 번호를 꾹 누르자 신호음이 가기 시작하고, 이 밤에 뭔 일로 전화했냐는 의아한 목소리가 곧 흘러나왔다. 하도 자주 전화했드렸더니, 이제 반기는 기색도 나날이 줄어드는 느낌이라 푸스스 웃어버렸다.
"할머니, 저 이번 주말에 내려가려구요."
"너야 뭐 하루가 멀다하고 오는데, 뭘 또 전화를 하구 그랴."
"-아니, 그냥. 할머니 목소리 듣고 싶어서."
"뭐 잘못 먹었누?"
매정하셔라. 그러면서도 속으로 내심 좋아하고 계시다는 걸 다 알기에 그저 웃어넘겼다. 벌써 닭백숙 하시겠다고 아침 일찍 일어나 시장에 가실 모습이 눈앞에 선한 걸요, 할머니.
"할머니. 집에 아직 낚시 도구 잘 있어요?"
"그거? 먼지가 우수수혀. 네가 와서 닦아 쓰어."
"네-."
그 후로 몇 마디 덕담과 일상적인 말들이 더 오고갔다. 저녁은 먹었지? 네, 할머니도 드셨어요? 잠 좀 일찍 자. 네, 그럴게요. 전화가 끊기고 나서는 저녁으로 어제 먹던 김치찌개를 다시 끓여 상에 내려놓고 한 손으로는 신문을 뒤적였다. 어서 할머니, 할아버지께 효도하려면 월급 받아야지. 아직 구직 광고는 많으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문득 고개를 드니 창밖의 구름이 시선에 들어왔다. 밤하늘의 물결이 젖어든, 현실의 구름은 꿈속의 것보다는 밋밋했지만 오히려 그게 더 현실감 있게 느껴져서 나쁘지 않았다. 총총 박힌 별. 그와 내가 만났던 호수는 지금쯤 저 하늘을 담고 있을까. 시골의 호수이니 별이 더 많이 보이리라.
만약, 이번 주말에 낚시를 하러 가면. 어쩐지 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곳에서 마주하는 밤하늘은 오늘의 것보다 아름답기를. 그걸 너와 함께 볼 수 있기를. 마음 속 가득 들어찰 만족감과 풍요로움, 그리고 11년 간의 그리움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채워질 어떤 감정이 벌써 기대감으로 미리 자리를 차지했다.
너를 만나면 꼭. 이번에는 네 이름을 물어보고 싶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