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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에요.'

​

…이쯤하면 됐을까.

​

잡고 있던 펜에 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손끝이 얼얼하다.
펜은 잠시 내려두고 손을 주물거린다. 꾹. 꾹.

​

투둑, 투둑. 투두둑. 쏴아. 쏴아아.
바깥에서 소녀를 부르는 소리가 점점 거세어져 간다.
이리와, 이리와. 같이 놀자. 하고. 그래.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

조금만 기다려. 아주 잠깐... 잠깐이면 되니까.
괜찮잖아? 이 정도는.

​

'지금의 내가 어떤 존재인지, 그건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어요.'

 


아. 춥다.
문득, 뜨거운 물을 욕조에 가득 받아두고 그 안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으응- 또 미루지 말자. 내려뒀던 펜을 다시금 집어 든다.

​

'감사합니다.'

 


사각.

'우울함은 전염되는 거래요. 내 우울도 여기에 담겨 전해지면 좋겠다.'

 


사각.

'오래전부터 생각했어요.'

 


사각.

'나는 당신을'

 


그리 넓지 않은 소녀의 방은 점차 우울한 푸른빛에 잠기고 있었다.
오래전 말라버린 눈물 대신, 비명 같은 속삭임으로 가득 차오른다.
사각, 사각. 손끝으로 표현하는 마지막 우울.

​

그것은 명백한 의도가 담기지 않은, 그만의 언어로 가득 찬 편지.

​

소녀의 악의. 그리고 선의. ㅡ외로움. 행복. 우울함. 기쁨. 행복. 사랑.
편지를 받을 사람들이 '특별함'을 느끼길 바라는 것. 그것이 유일한 '의도'.

​

'사랑해요.'    ㅡ사랑. 방금 적은 그 문구를 거칠게 어둠으로 덮어버리며 눈을 비볐다.

​

'사랑해요.'

​

......싫다. 아. 정말로. 싫다.

​

무엇이 싫은지 대상도 제대로 정하지 않고서 끊임없이 웅얼거렸다. 싫다. 싫다. 싫다.
마지막까지 진심과 거짓의 모호한 경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내가 싫다.
걸레 짝처럼 너덜너덜해진 심장조차 내 것이라며 놓지 못하고 얽매이는 내가 싫고,
자기애와 연민으로 가득 찬 자신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것이 싫다.

​

아. 힘들어.

​

힘들다.

​

자신의 생각과, 생각과, 생각에 잠겨, 그렇게 질식해 죽어버릴 것 같아.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 생각들. ㅡ너희는 왜 붉은색이야?

​

울컥.
가슴이 답답하다. 아. 이쯤 하면 됐을까 싶었는데.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았는데.
오늘도 틀렸어.

​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껏 쓰던 모든 편지. 다 들고서 화장실로 걸어간다.
제 몸무게보다 훨씬 나가는 거대한 짐을 이고 있는 것 마냥, 몹시 무거운 걸음으로.

​

ㅡ콰르륵.

​

변기 레버를 내리며 생각했다. 아 얘는 참. 평소에도 온갖 찌꺼기란 찌꺼기는 다 먹어치우는데.
하하. 이젠 내 찌꺼기도 네가 먹는구나. ...찌꺼기. 그래. 존재 의미가 흐릿한 그런.

​

주기적으로 생기는데 왜 생기는지도 모르겠고, 당연하게 생기지만 전혀 달갑지 않은 그런.

​

투둑, 투둑. 투두둑. 쏴아. 쏴아아.
바깥에선 여전히 소녀를 부른다. 좀 전보다 더욱 강하게.
빨리 와. 어서 와. 함께 있자. 나랑 있자. 그렇게, 그렇게 그를 부르는 것 같다.

​

아아... 소녀는 느릿하게 창가로 향했다.

​

창문을 열자, 기다렸단 듯 제 얼굴을 덮는 빗줄기. 어찌나 강하게 내리는지, 아프다.
거칠게 떨어지는 빗줄기에. 아파. 얼굴이. 아파. 마음이. 그래, 마음이.

​

조금만 기다려. 아주 잠깐... 잠깐이면 되니까.
괜찮잖아? 이 정도는.

​

소녀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이상하게 구겨진 얼굴로.
그런 얼굴로 소녀는 ㅡ짐승처럼 울부짖었다.

​

쏴아.

​

쏴아아.

​

쏴아아아.

​

.....

​

...

 

​

​

 

'원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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