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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1940

 

세상이 끝물 같은 어둠에 잠겨도 신호를 보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로라 히치콕은 라디오를 켰다. 그녀는 자신의 눈꺼풀이 창백한 껍질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쁜 소식에도 자신이 버틸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주파수를 잘 맞췄는데도 음질이 나빴다. 잘게 썰리듯 밀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나빴다.

이 개월 전, 로라 히치콕은 진줏빛 바지를 입고 모래밭 위에 서 있었다. 뒤꿈치는 젖어있었고, 짠내가 났다. 그녀는 그곳에서 연인 케빈 일리자드와 남동생 벤자민 히치콕을 배웅했다. 그들이 전쟁에서 돌아올 거라는 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모든 비극은 우리가 유한하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September, 1981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호텔 로비 보이가 파란색 봉투를 건넸다. 봉투 겉면에 벤자민 히치콕의 서명과 쓰다만 문장이 적혀 있었다.

 

세상이 끝물 같은 어둠에 잠겨도.

 

정오가 되도록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벤자민의 전화 덕분에 생각이 났다. 나는 걸어둔 외투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그래서 이게 뭔데요? 벤자민은 이게 연애편지의 일부라고 했다. 누구의? 벤자민은 잔뜩 쉰 웃음만 흘렸다. 나는 그가 당장에라도 촛불처럼 꺼질 것 같아 무서웠다. 함께 있을 땐 아무런 걱정 없이 물 한 컵을 건네줄 수 있었는데도.

 

“네가 배달해줘.”

 

벤자민이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인듯했다. 우리는 전화를 끊었다, 끊었을 것이다. 괜히 아쉬워져서 수화기를 오래 들고 있는 벤자민은 상상이 잘 가질 않는다. 물론 엄마가 해준 이야기 속의 벤자민은 항상 “참 너무한 남자”이긴 했다. 벤자민이 이십몇 년간 교제했던 애인과 헤어졌을 때도, 설거지를 잊어버렸을 때도, 엄마의 맥주를 사다 주지 않아도 그는 참 너무한 남자였기 때문에 일종의 감탄사처럼 쓰인 셈이다.

 

네 엄마는 내가 죽었다가 되살아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아.

무슨 의미예요?

자꾸 호들갑을 떨잖아.

 

벤자민이 짜증을 낸 건 작년 크리스마스이브가 유일했다. 엄마는 소파에 구겨져 잠들어 있었고, 우리는 각각 테이블과 바닥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취해서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얘기를 많이 했다. 엄마와 함께 껌을 훔쳤다가 외할아버지에게 혼난 일, 엄마가 개를 죽였다고 생각해서 가출한 일(“당연히 로라 잘못이 아니었어. 그 녀석은 그냥 너무 늙었던 거야.”), 그리고 그놈의 “참 너무한 남자”.

 

걔가 그럴 때마다 자기 젊을 때나 되돌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어땠는데요? 말해봐요. 다음에 편들어 줄게요.

 

벤자민은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은 누나는 아니었지. 하지만 나라고 좋은 동생이었던 건 아냐.

 

오 분 뒤, 벤자민은 곯아떨어졌다. 나는 담요를 두 장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는 벤자민에게, 다른 하나는 엄마에게 덮어주었다. 엄마의 눈꺼풀이 잠깐 뜨였다.

 

얘, 지금 크리스마스니?

아직요. 좀 더 자요.

 

엄마는 다시 잠들었다. 그 뒤로 엄마와 좀 더 의미 있는 대화를 한 것 같진 않다. 두 달 뒤 엄마는 대학생들 앞에서 강연하던 중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다시는 그들 앞에 서지 못했다. 장례식장에서 벤자민은 말했다.

 

저번에 어릴 적 개 죽었던 얘길 하지 않았니. 정말 로라가 죽였다고 생각해서 집을 나간 게 아니야. 그땐 그냥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단다. 아직 살아있는 모든 게 미웠고, 내 개가 그러지 못해서 슬펐거든. 씩씩거리면서 들판 두 개는 넘어갔던 것 같아. 하지만 비가 오기 시작하자 춥고 무서워지기 시작했어. 더 걷는 것과 집에 돌아가는 것 중 망설이고 있는데, 계속 쫓아오던 로라가 마침내 날 따라잡았지. 걘 이 말밖에 안 했어. 벤, 너무 오래 울지는 마.

 

벤자민은 내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했단다.

 

*

 

편지 수신지는 호텔과 국립공원 사이에 있었다. 어젯밤 받은 연락에 의하면 촬영준비가 생각보다 늦어진다고 하니, 먼저 편지를 줬다가 공원에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알맞은 주소에 도착했다.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공동 아파트는 벤자민의 애인 헤이미 일리자드가 사는 곳이었다. 물론, 9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는 얘기다.

초콜릿 색 문을 두들기자 헤이미가 얼굴을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헤이미는 별로 놀라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나이 든 여자에겐 적지 않았을 시간이 지났는데, 헤이미는 여전히 날씬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좁은 거실의 작은 탁자 앞에 앉았다. 헤이미는 차와 과자를 내오는 대신 내 손등을 약간 만졌다가 내려놓았다.

 

“갈수록 로라를 닮아가네요. 벤자민은 어떻게 지내나요?”

“안 좋아요. 요즘은 병원에 계세요.”

“그 집안사람들은 전부 심장이 안 좋았죠.”

 

헤이미는 내가 건넨 파란색 봉투를 살펴보더니 조용히 글귀를 읊었다.

 

“세상이 끝물 같은 어둠에 잠겨도.”

“신호를 보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헤이미의 시선이 느껴졌다.

 

“미안해요. 먼저 읽어봤어요.”

 

나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봉투에 든 건 엄마의 오래된 시와 편지였다. 누구에게도 부치지 않은 것이어서 받는 사람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벤자민 히치콕이 이 편지를 헤이미 일리자드에게 전한다면 그 대상은 명확했다. 케빈 일리자드. 9년 전, 그의 여동생 헤이미 일리자드와 벤자민이 사귀었을 때까지만 해도 자주 들을 수 있는 이름이었다.

 

“케빈이 너무 일찍 죽은 건 사실이에요. 로라가 내게 잘해줬던 것도 사실이고요. 로라가 당신 아버지와 헤어졌을 때, 어떤 의무감이……나와 벤자민에게 전혀 없었다고는 못하겠네요. 그래도 우린 로라를 좋아하는 것만큼 서로를 좋아했어요.”

 

그러나 모든 비극은 우리가 죽었거나 죽을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제 나는 벤자민이 헤이미와 헤어진 이유가 그의 건강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지금쯤 벤자민이 죽어가고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엄마가 벤자민을 참 너무한 남자라고 부르는 걸 좋아했던 게 기억나요.”

“참 너무할 정도로 한결같긴 하죠.”

“무섭다고 한마디만 하면 될걸.”

 

나는 내 카메라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내가 포착할 수 있는 거라곤 겨우 한 장면, 어떤 찰나였기 때문에 벤자민을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 모든 조각을 기워 붙이는 일은 내 전공이 아니었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언젠가의 로라 히치콕은 사람들이 신호를 보낼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이 끝물 같은 어둠에 잠겨도 너무 오래 울지는 말라고.

 

남은 사람들은 그 신호의 운반자가 될 것이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삶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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