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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우리를 위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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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오래전에 추방되었다. 오래 전이라는 표현은 내 삶을 기준으로 한 계산이다. 먼저 나를 설명하자면 내게는 알파벳과 아라비아 숫자로 이뤄진 이름이 존재한다. 전자 기기 따위의 고유 번호 같은 것이 내 이름인 이유는 꽤나 단순하다. 그저 내가 인류의 생명 공학 발전이 정점에 도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의 지구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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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유전자 재배열을 통해 태어난 존재는 차고 넘쳤다. 부모가 아이를 입맛대로 조합하고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었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대부분의 이들이 그러했고 그들 중 반 이상이 특수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재배열이 가져온 부작용 중 하나였으나 인류는 그것을 축복이라 여겼다. 나쁠 것도 없었다. 약한 염력이나 텔레파시, 감각 중 하나가 뛰어나게 발달하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내가 태어났다. 부모의 선택을 받은 건 아니었다. 그들이 나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역사에 남을 비극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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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프로그램에 따라 무작위로 배열된 유전자 중 하나였고 나를 선택한 것은 각 국가의 생명 공학 총회를 관리하는 국제기구였다. 가장 처음 나를 발견한 프릭 박사가 말하길, 내 유전자 배열은 신이 장난이라도 친 것 같은 구조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습게도 내가 태어날 적 존재하던 최고의 인공 지능은 나를 불량으로 판단했다. 만약 그날 프릭 박사가 데이트 상대에게 바람맞지 앉아 태아 유전자 관리소에서 야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세상에 나오지 못 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 그녀가 국제 연구소에서 살다시피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제 부인을 만나지 못했으리라. 어쨌든 나는 국제기구 수장의 승인 아래 비밀리에 태어났다. 유전자 재배열. 두 단어의 조합이 나의 능력이었다. 나는 전무후무한 돌연변이였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는 슬픈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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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이렇다 할 특정한 외모가 없었다. 인간의 형상과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재배열을 통해 누구든 될 수 있었다. 멜라닌 색소부터 시작해 미세한 근육, 뼛조각 하나까지 모든 것을 의지대로 바꿀 수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움직이고자 한다면 그렇게 됐고 손가락을 뒤로 꺾을 수 없는 것처럼 무리한 변화는 불가능했다. 멀리 있는 것을 세밀하게 보거나 작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가장 특이한 변화는 성별에 관한 것이었다. 내 최초의 성(姓)은 남성이었으나 시간이 흐르자 그것도 의미가 없어졌다. 호르몬이나 생식 기관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재배열이 가능했다. 내 부모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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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작은 노선과도 같았다. 늘 같은 역에서 출발해 같은 역에 도착했다. 분 단위로 흘러가는 일상 자체가 실험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눈을 감는 그 모든 일과가 연구의 하나였던 것이다. 매 끼니마다 나오던 식사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위화감을 느꼈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평생을 그렇게 지내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아니, 다른 길을 알았더라도 걸을 수 없었을 게 분명하다. 나는 생의 시작부터 선택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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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가 되던 해에 처음으로 섹스를 했다. 그 시기의 나는 정기 교육을 통해 미디어 매체를 배우던 중이었다. 수업 과정 중 매거진 데이터 하나를 받았다. 어차피 가둬놓고 연구할 것이면서 왜 저런 교육을 했을까. 아마 프릭 박사의 영향이 크겠지. 나는 그 매거진을 꽤 좋아했고 거기 나오는 여배우를 곧잘 따라 하고는 했다. 그녀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연구진이 유독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 취미는 몇 달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한 남자를 만났다. 연구소로 발령 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연구원이었다. 그는 내가 긴 금발을 어깨 뒤로 넘길 때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그게 무언의 신호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맞았고 얼마 후 수면 모드로 전환된 내 방에 그가 찾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그를 불렀다. 내 살결에 닿던 눈빛을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긴 하지만, 그에게는 내 눈빛이 또 다른 무언의 신호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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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교육과 커뮤니케이션 수업을 마친 상태였다. 섹스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도 있었다. 유전자 재배열로 태아를 만드는 세상에서 섹스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주제로 프릭 박사와 긴 토론을 한 적도 있다. 조심스레 들어온 그가 내 볼에 손을 댄 순간 어떤 냄새가 났다. 다른 사람들이나 평소의 그에게서 맡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나중에서야 그게 호르몬 냄새라는 걸 알았다. 왜 후각이 예민해져 있었을까. 무의식적인 재배열을 알아차리지 못 할 정도로 긴장했던 모양이다. 나머지 일들은 진부하고 뻔하게 흘러갔다. 모든 게 처음이라 조금 서툴게 굴기는 했지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그에게는 내 껍데기가 가장 중요했을 텐데. 그와 나는 각자를 위한 섹스를 했을 뿐이다. 아쉽게도 그는 다음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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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몇 번이나 그런 섹스를 했다. 상대는 여성이기도 했고 남성이기도 했으며 때때로 동성 섹스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언제나 타의로 연구소를 떠났다. 이런 일이 빈번해지자 연구소 측에서는 적당한 주기를 두고 섹스 서비스를 받는 게 좋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이 시대의 매춘은 그저 판매 직종의 일환이었다. 자연 출산이 사라진 시대에서 매춘은 그 어떤 타락의 의미도 갖지 못 했다. 성별을 떠나 가난한 이들이나 흥미를 가진 이들이 찾는 직업군 중 하나였다. 사실 연구소 측의 본심은 달랐을 것이다. 보안을 강화하면 그만인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린 이유는, 언제나 그렇듯 프릭 박사였다. 그녀와 함께한 연구진의 의견과 상부의 의견이 맞물린 지점이 바로 저 정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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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서비스. 나는 거부했다. 그렇게 허무한 기분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성욕마저도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삶이었다. 원초적인 개념조차 묵살 당해버리고 마는 삶.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그 시간을 삶이라고 불러도 되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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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많은 것을 할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21세까지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나는 프릭 박사의 부재를 통해 유전자 재배열을 뛰어넘는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했다. 그녀는 나를 인간으로 대하던 단 하나의 존재였다. 내 지식, 정서 발달, 감정 상태는 재배열이 불가능한 고유 영역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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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의 손에 들린 주사기를 녹여버린 사건이 계기였다. 프릭 박사가 떠난 지 한 달이 지나자 나는 극도로 예민해졌고 그 어떤 실험에도 호의적이지 못 했다. 주사기를 놓친 연구원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었다. 반대로 나는 자그마한 희망을 찾았다. 체내 유전자 재배열과는 달랐지만,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시간이 날 때면 가만히 방에 앉아 전구나 볼트 따위를 가지고 놀았다. 어느 때부턴가 실험 일정이 멈췄고 나는 할 일이 없어졌다. 그 덕에 곧 외부 재배열에 익숙해졌다. 불필요한 것은 버리고 필요한 것은 주변에서 끌어다 구성해내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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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감각을 높여봐도 여느 때와 달랐다. 평화로웠고 사색에 빠질 시간이 늘어나 기분이 좋았다. 모든 연구진이 숨죽여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걸 나만 몰랐다. 외부 재배열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능력인지 나 하나만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멍청한 나는 연구진의 동태를 살피며 몇 주를 잠자코 있다 탈출을 감행했다. 탈출이라 부르기도 우스운 게, 연구소를 아주 떠날 요량이 아니었다. 프릭 박사를 만나고 나서 돌아오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몸을 움직였다. 연구소의 벽을 연이어 허물고 나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간단했다. 그녀의 체취와 목소리만 따라가면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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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나는 그녀를 만나지 못 했다. 1시간 38분. 연구진이 나를 찾아내 마취 총을 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수많은 바늘이 날아와 꽂혔다. 재배열을 할 새도 없었다.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완전 무장을 한 요원들에게서는 두려움의 냄새가 났고 나는 그게 너무 슬펐다.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순리를 따랐다. 이게 정말 순리인가. 사실 나는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호기심이 많고 가끔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단 한 번도 악의를 품은 적은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부모의 영향이겠지. 어쩌면 프릭 박사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가끔 고맙다는 말을 했다. 널 발견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줘서 고마워. 내가 더 고마웠다. 그녀는 그때도 지금도 모를 테지만, 나는 그 말이 꼭 사람답다는 말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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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머리를 처박는 순간, 모든 것이 서러워졌다. 나는 당신들과 무엇이 그다지도 다른가. 내가 원해 태어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왜 내게 그 많은 것을 가르쳐 스스로를 동정하게 만드는 걸까. 나는 왜 나를 위해 살 수 없는가. 왜, 나는. 나는 왜 태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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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 결정은 빠르게 이뤄졌다. 눈을 떴을 때는 갖가지 연구가 끝나 있었고 추방 결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잠든 나를 추방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차가운 길바닥에서 잠들어 낯선 우주에서 깨어나다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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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본 프릭 박사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녀는 추방 근거가 타당하지 않다며 분개했다. 그러나 곧 어깨를 늘어트렸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너를 추방하다니, 이건 말도 안 돼. 윤리적이지 못 하다고.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서 웅얼거리다시피 말했지만, 내 고막은 그녀가 뱉는 단어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미안해. 널 찾아내서 미안하다. 이렇게 살게 될 줄 알았다면 모른 척했을 거야. 프릭 박사는 그렇게 말하며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손가락 새를 타고 흘러나온 울음이 방 안을 누볐다. 그녀의 손을 끌어내려 꽉 잡았다. 탈리아, 후회하지 말아요. 내 존재를 부정하지 마세요. 그냥 예전처럼 고맙다고 해줘요.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천천히 무너졌다. 나는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댄 늙은 여자에게로 몸을 숙였다. 굽은 등 위로 같은 색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그때의 나는 그녀를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구불구불한 붉은 파도 사이로 하얗게 샌 세월이 보였다. 조용히 등을 다독이며 그녀의 흰머리를 재배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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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발견한 그녀가 원망스러운 날도 있었으나 그보다 사랑한 날이 더 많았다. 그녀도 나를 사랑했을까. 죄책감과 동정을 이고 진 탈리아의 어깨에 사랑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평생 나에게 미안해하며 살 그녀가 가엽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가여운 것은 저 먼 우주로 추방될 나였다. 여기보다 더 외로운 곳은 없을 줄 알았는데. 나는 눈을 감았다. 고맙다는 말은 끝내 듣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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