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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1일째.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세 줄 내내 글자를 썼다가 대충 지운 흔적이 반복된다.)

 

(귀퉁이에 단어들이 두서없이 적혀 있다.) 고립, 변화, 두려움, 종말, 생존, 의무감.

 

확실한 건, 내가 창살 밖으로 다시 나왔을 때에는 어떤 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온 사방이 조용했다. 물론 감방 안도 조용하긴 했다. 특정 무리들이 포악질을 부리지 않을 때뿐이었지만.

 

그러나 온 세상에 팽배해 있는 이 고요는 좀 더 본질적이었다.

 

세상, 지금 밖에 있는 저것을 세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2일째.

식량이 필요하다. 물, 물도 필요하다. 물.

 

감옥 안에 있는 식량이며 저장된 물을 확인해 봤다. 정확히는 트럭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건물 안에 있는 건 아니다. 엊그제 식량이며 물, 그리고 생필품을 조달하는 트럭이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걸 봤다. 천운이었다. 만일 이 일이 트럭이 오기 전에 벌어졌다면 얼마 못 가 죽었을 것이다. (옆에 조그맣게 ‘아사’라고 쓰여 있다.) 몇 백 명의 수감자들을 한 달 동안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이니, 혼자서는 몇 년이고 쓸 수 있을 것 같다. 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껴야 한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라디오며 TV도 찾았다. TV는 켜지지도 않는다. 전기가 나간 모양이다. 수도 시설도 엉망이었다. 물을 쓰려면 직접 길어 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라디오는 작동된다. 이리저리 주파수를 맞춰 봤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라디오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밖은 황무지가 되어 있었다. 이 감옥이 첩첩산중에 있다는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볼 때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늘은, 그걸 하늘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주홍색이었다. 석양빛은 결코 아니었다. 좀 더 원색적인 오렌지 빛이었다.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못 찾은 것뿐일지도. 내일은 해를 찾아봐야겠다.

 

달은 두 개였다. 아니, 한 개 반. 그리고 컸다. 원래 달이 손톱만 했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달은 양 손으로 가려도 잘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크다. 오른쪽 달은 반파되어 있다. 파편처럼 보이는 것들이 부서진 달 주변에 떠 있다.

 

공룡이 멸망한 게 운석과의 충돌 때문이라고 하던데, 혹시 그것과 비슷한 상황일까?

 

 

 

3일째.

아무 일도 없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쥐가 들끓었는데.

 

공중전화를 찾았다. 옆에 있던 공중전화 하나를 부숴서 동전을 꺼냈다. 휘두를 만한 것을 찾기 위해서 정말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기계실? 정비실? 그걸 뭐라고 부르지? 아무튼 그 곳에서 공구함을 찾아냈다. 쓸모 있어 보인다. 챙겨 놓았다.

 

다시 돌아와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받지 않았다. 기억나는 번호가 없어 관공서 번호를 모두 눌렀다. 누르다가 동전이 부족해, 옆에 있던 공중전화들을 모두 부쉈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4일째.

폭풍전야일까?

내일은 다른 쓸 것을 찾아봐야겠다.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종이, 볼펜, 연필……….

 

 

 

5일째.

건전지 두 개와 손전등을 찾았다. 손전등 안에는 건전지가 들어 있다. 여전히 고요하다. 아무 일도 없다. 차 티백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맹물은 지독하게 맛이 없다.

 

 

 

7일째.

정말로 아무도 없는 걸까?

 

 

 

9일째.

날짜를 셀 필요가 있다. 시시콜콜한 것까지 기록할 필요는 없지만.

 

 

 

10일째.

첫 날 내가 느꼈던 위화감이 뭔지 알겠다. 열흘이 다 되어 가도록 인기척이 없는 건 이상하다. 라디오에서는 치직거리는 소리만 이어진다.

나만 살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13일째.

사람을 찾았다! (느낌표를 어찌나 세게 썼는지, 종이가 다소 찢어져 있다.)

 

감옥이 워낙 큰데다가, 수감 생활을 할 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어 이 곳의 구조를 잘 몰랐던 탓에 생존자들(생존자들이라고 불러도 되겠지?)과 합류하는 게 늦어졌다. 네 명 정도 된다. 좀 더 멀리까지 나와본 게 도움이 됐다.

 

둘은 나도 알고 있다. 덩치가 산만한 자들로, 사회에 있을 때 조폭인지 마피아인지, 아무튼 그런 일들을 했다고 들었다. 감옥 안에서도 그들은 유명 인사였는데, 워낙 성질이 잔악하고 그걸 실천할 수 있는 힘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목도 살인이었다. 다른 패거리와 싸움을 하다가 그랬다고 들었다. 피해자의 수가 두 자리를 넘어간다고 하니, 단순히 살인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하나는 두 사람의 시다바리다.

 

그리고 남은 하나, 그 하나가 묘하게 시선을 끈다. 처음 본 사람인데.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나 유독 새까만 눈동자가 귀신을 연상시킨다.

 

어쨌거나 나는 그들에게 내가 지금까지 찾아낸 물이며 음식, 생필품에 대해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14일째.

불쾌한 자들이다. 어울리고 싶지 않다.

 

 

 

15일째.

전직 조폭들이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멋대로 부려 먹으려고 하고 있다. 손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시다바리는 이 상황에서도 좋다고 그들이 찾아낸 음식이며 물을 갖다 바친다. 주차장이 내가 있는 곳과 가까워서 다행이다. 이들은 아직 트럭들을 발견하지 못한 듯하다.

 

귀신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두 조폭도 귀신에 대해서는 무언가를 하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대신 옆에 끼고 툭툭 건든다. 음산하긴 하지만, 귀신은 얼굴이 퍽 반반한 편이었다. 감옥에서는 좋은 일이 아니지.

 

마치 인형 같았다. 심심풀이용 인형.

 

이 일이 벌어지기 전부터 귀신은 두 사람에게 이런 대우를 받아 온 걸까?

 

저들이 혹시 현재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을까 싶어 물어봤지만, 물을 덥히라는 말이 되돌아왔을 뿐이었다.

 

 

 

16일째.

귀신의 얼굴이 멍이며 상처로 가득했다. 비단 얼굴 뿐만은 아닌 것 같다. 린치라도 당한 건가?

 

 

 

17일째.

시다바리가 다리를 절고 있다. 이도 두어 개 부러진 것 같다. 눈치를 보며 조폭들의 시중을 든다.

 

 

 

20일째.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 사실은 아니지만. 이걸 쓸 정도는 된 것 같다.

 

벌써 삼일 째 비가 내린다. 아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굳이 말하자면 ‘오른다’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아니, 그 이전에 지금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저 물줄기를 비라고 부를 수 있을까? 더군다나 물은, 무슨 다른 성분이 섞였는지 녹색이었다. 하지만 비 이외에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그러니까 비라고 부를 것이다.

 

비는 더러웠다. 땅에서 올라가니 그럴 만도 하지. 혹시 커진 달 때문일까? 중력, 뭐, 그런 건가?

 

내가 린치를 당한 지 이틀 정도 지났다. 그러니까 이 일은 이틀 전에 일어난 일이다. 앞으로는 내 목소리를 들을 일이 없을 거다. 그 내용까지 자세히 쓰고 싶지는 않다.

 

내가 상황을 확인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끝난 후였다. 귀신이 황무지 한복판에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중요한 건 생존자가 두 명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까 비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했지………. 그건 기괴했다. 땅 위의 모든 것들이 비와 뒤섞여 오렌지빛 하늘로 올라갔다. 귀신과 눈이 마주치자 온 몸이 오싹했다. 그러나 귀신은 곧 흥미를 잃은 듯 감옥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저것들을 치워야 할까?

 

 

 

21일째.

귀신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대화를 나눴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방적으로 몇 마디를 내뱉고 가 버렸으니까.

세상의 끝. 귀신은 세상이 끝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뭐라고 했더라……….

 

 

 

22일째.

종말.

시작.

 

 

 

26일째.

신인류.

 

 

 

39일째. 0년 1월 1일.

며칠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일들이 생길 것이다. 나와 A를 비롯해 모든 생명체가 종말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 말이다.

 

A는 지금까지 내가 귀신이라고 불러 왔던 사람이다. 내가 이름을 주었다. 나도 새 이름을 지었다. E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은 과거의 질서다. 그리고 종말을 기점으로 폐기되었다.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 새로운 세상에 어울리는. 나는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다. 독점은 권력이다. 나는 새로운 인류의 시발점이다. 원한다면 신도 될 수 있다. 내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신인류가 결정될 것이다. 정치, 문화, 경제, 사고방식까지.

 

이제 필요한 건 권력을 인정할 하위 계층이다.

 

 

 

0년 3월 8일.

물이며 식량이 슬슬 부족해지고 있다. 벌써 오랜 기간 물과 비옥한 땅을 찾아 헤매고 있지만 그다지 성과는 없다. 하지만 A를 배제할 수는 없다. A는 나와 함께 새로운 인류의 부모가 되어야 하니까. A에게는 내가 식량이며 생필품, 물을 어디에서 조달해 오는지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내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A는 음흉한 자다.

 

 

 

0년 5월 16일.

물이 솟는 샘을 찾았다. 앞으로 태어날 후손의 번영을 위해 물은 꼭 필요하다.

 

 

 

0년 12월 7일.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흙을 찾았다. 일 년 가까이 만져 온 다른 흙과 섞어 봐야겠다. 식량이 떨어지기 전에 재배에 성공해야 한다. 우선은 감자 같은 뿌리식물을 심어 보기로 했다. 벼 같은 작물은 그 다음이다.

 

 

 

1년 1월 4일.

아이들이 태어났다. 쌍둥이다. A의 표정은 덤덤했다.

 

 

 

1년 2월 9일.

‘인류’를 만들어내기 위해 A와 나는 계속 노력해야 한다.

 

 

 

1년 7월 23일.

먹는 양을 줄였다. 식량이 동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토양이 문제인지 비가 문제인지, 농사는 난항을 겪고 있다.

아이를 품은 몸으로는 괴롭겠지만 별 수 없지.

 

 

 

2년 5월 2일.

한 아이가 또 태어났다. A의 얼굴이 창백하다.

 

 

 

2년 8월 7일.

A가 우리의 원대한 계획에 훼방을 놓았다. A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방치한 내 탓이다. 인구수가 줄어든 건 곤란하지만 또 새로운 아이가 태어날 테니 괜찮을 거다. 아이들이 좀 더 자라면 우리의 노력에 보탬이 될 수도 있겠지.

A는 나를 괴롭히려는 건가? 그러나 부질없는 노력이다.

 

 

 

2년 9월 13일.

A를 묶어두었다. 아이들을 또 습격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빨리 자라 주었으면 좋겠다. A는 위험하다.

 

 

 

2년 10월 7일.

A가 사라졌다.

 

 

 

2년 10월 8일.

악몽을 꿨다. A가 나를 죽이는 꿈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2년 10월 17일.

또 다시 인구수가 줄었다. 갓난쟁이 하나만이 남았다.

A의 짓이다. 틀림없다. A를 찾아야 한다.

 

 

 

2년 11월 25일.

나뿐이다.

 

 

 

2년 12월 3일.

살인마가 날 죽일 거야.

 

 

 

(다섯 쪽이 빈 페이지다. 여섯 번째 페이지에 전혀 다른 글씨체로 몇 줄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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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가                                                   오                                  른

​

다                         .                                               오            렌                            지

​

빛                                                                하                늘                                 에

​

물                             웅                                덩                 이                               가

 

생                        긴                               다                  .                                       파

​

문                             을                                                          일                          으

​

키                             며                                                          퍼                          져

​

나                                             간                                   다                                    .

​

녹                                             색                                                                         물

​

방                                             울                                    이                                 온

​

몸                                             을                                                                         적

​

신                                                                        다                                                .

​

비                              를                                                                맞                    는

​

것                        은                                                         좋               다                 .

​

오                 늘                 은                                      비           가                       오

​

른                                                                           다                                              .

​

같                              이                                                                  맞                   을

​

수                                                         있                        겠                    네             .

 

​

(글씨가 온통 번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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