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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쏟아졌다. 손에 긴장이 풀린 탓이다. 소녀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볼을 긁적이는 소년을 바라보다가, 꽃을 주우려 몸을 숙였다. 아, 도와줄까? 아니, 괜찮아. 소녀는 입 꼬리를 억지로 올려보였다. 미안해. 내가 사람을 착각했나 봐. 꽃을 줍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도망쳤다.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또, 또다.

누군가 시계에 손가락을 넣어, 억지로 시간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30일을 거꾸로 돌리고 난 후에야, 그는 손을 거뒀다.

 

언제부턴가 소녀는 5월의 사람이 되었다. 세계를 멸망시키고 싶어, 그렇게 말한 신을 막았기 때문이다. 부수고 싶다고 부술 수 있는 게 아니야. 너에게는 한 순간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하나의 삶이고, 역사야. 물론, 나도 가끔 세상이 멸망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지. 있지만, 역시 그냥 듣고는 못 있겠어.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살아 숨 쉬게 한 책임을 지라고. 그러자 신이 붉은 이를 드러내며 잔혹하게 웃었다. 그럼 대신 네가 부서지면 되겠네.

세계는 멈췄다. 소녀는 5월 31일 오후 열두 시 반 이후의 일을 알지 못한다. 신은 약속을 지켰을까? 세계는 그대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소녀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시작한 반지를 나눠 끼는 사이가 되기를 바라는 사랑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며 웃던 사랑도. 소녀 자신도 가라앉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이 무뎌지고 여지저기에 금이 간다. 이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아.

감정에 휩쓸리게 행동한다면, 너도 인간과 다르지 않아. 그래, 대신 나를 부숴. 그리고 그건 네가 인간이랑 같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만 알아 줘. 신은 코웃음 쳤다. 있지, 너희 인간이라는 종족 중 몇몇은 내가 세계를 무너뜨리고 저들을 심판하러 올 거라고 믿어. 나는 세계를 만들었지만, 인간은 나를 만들었어.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지게 했지. 이것도 저것도, 전부 다 책임인거야. 하지만 좋아, 네가 바란다면. 하지만 나는 너희와 같지 않아. 로봇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인간으로 끼워주지 않는 것처럼. 아쉽게도 말이지.

 

학교를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끝이 다 헤진 교복을 입고, 자신을 기억하지 않는 교실에 발을 딛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머리카락은 기름에 잔뜩 뭉쳐 먼지가 잔뜩 묻었고, 아무것도 받지 못한 속이 아프다고 요동친다. 나도 저기 식당에서 친구들과 밥을 먹고, 남은 시간을 공부에 쏟고 싶다. 언제나 그렇다. 일상처럼 느껴졌던 것은, 사라진 다음에야 그게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녀는 몸을 벽에 기댔다. 이 벽 너머에는 저만이 기억하는 추억이 있다. 벽을 타고 치맛자락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고개를 돌린다. 곧, 저를 봤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릴 것이다.

“왜 여기 있어?”

“아.”

어제 그 소년이 벽 너머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달 후의 소년일 것이다. 이름이 뭐였는지 또렷하게 기억나는데, 차마 입으로 뱉어낼 수가 없다. 몸을 웅크렸다. 이런 상황은, 분명 이전까지 없었는데. 당황스러운 마음에 심장이 뛰었다. 소년은 제가 기억하던 그대로 곱슬머리를 가지고, 깔끔한 교복을 입었다.

“갈 데가 없어서.”

“너 우리 학교 학생이지?”

소녀는 무언으로 답했다. 그랬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아.

기억난다. 재작년, 처음 만났을 때. 혼자 있던 내게 말을 걸어주던 너. 중학교 3학년, 놓인 선택지 앞에서 ‘어린아이’라는 호칭을 슬 벗고 자신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시기. 시간이 흐르고 흘러 11월 중반 즈음으로 접어들자 더 이상 중학교에서의 시험은 없었다. 체육시간은 자유시간이 되었고, 아이들은 자신들을 성별이라는, 자신이 정할 수 없는 것으로 구별하여 놀았다. 늘 여자 아이들은 피구를, 남자 아이들은 축구를 했다. 고교에 올라와서도 별 반 차이가 없다.

축구도 피구도 하고 싶지 않았던 소녀는, 교실에서 혼자 놀았다. 그저 보고 싶은 것들. 세상 돌아가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떤 말을 했는지 휴대폰으로 검색하거나, 그것도 지루해지면 책을 사 와서 읽었다. 어차피 그 시기는, 선생님도 학생도 출석에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학교를 안 나가기도 뭐 했으니까.

친구가 없었네, 라고 말한다면 정답이다. 관심사가 맞지도 않는 아이를 붙잡고 떠드는 건, 자신을 학대하는 최고의 방법일 거라고 소녀는 믿었다. 그래서 일부러 친구를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 아이가 들어왔다. 아, 이 아이 안다. 매년 열리는 학교 축제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아이. 2학년 때 가까이 앉았던 덕분인가 얼굴만은 알고 있었는데, 11월이 되었는데도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나중에 이 녀석, 이름을 물어보니 엄청 놀라더라고.

「왜 혼자 그러고 있어? 오, 멋진 신세계? 그거 재밌지! 나도 읽어봤는데…….」

이런 아이들 꽤 있다. 왜 혼자 있냐며, 같이 밖에 나가자고 하는 아이들. 동정이다. 그렇게 좋지 않는 기분으로 이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책 표지에 박혀있는 그림에 마음에 들지 않아서 종이공작으로 여차여차 가린 것을 보지도 않고, 책 내용을 간단하게 훑어 본 정도로 제목을 유추했다는 게 놀라워서 인상이 확 바뀌었다. 잘 하면 친구가 될 수 있을지 몰라.

중학교와는 집과 거리가 꽤 되어서, 고등학교는 되도록 주소지와 가까운 곳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후기고등학교 서류를 넣었다. 2월이 되자 발표가 났고, 같은 고등학교가 되었단 걸 안 것은 3월 2일 입학식 때였다. 왜 예술고 안 넣었어? 기숙사 생활하기 싫어서, 시내까지 오래 걸리잖아. 소년은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 학교 학생인거야, 아닌 거야?”

대답이 없자, 소년은 볼을 부풀리며 재차 물었다.

“예전에는.”

“자퇴했어? 아님 퇴학? 졸업?”

“어느 쪽도 아냐.”

“그럼 뭐야, 제대로 말해.”

소년의 신경질적인 말에 소녀는 웃었다. 소년은 확실하지 않은 것을 싫어했다. 예를 들어 수학 문제의 답이 ‘없음’이거나 ‘무한히 존재한다.’같은 것들. 그런 허무한 결론을 내릴 거면 차라리 내지 말라고 선생님께 항의하려고 든 적도 있었다. 소설을 읽다가도 그런 표현이 나오면 탁, 소리를 내며 표지를 덮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가도, 다시 책을 집어 읽기 시작했다. 반짝거린다거나, 그런 건 어느 정도인 줄 모르면 짜증이 나거나 하는 거야? 소녀의 물음에 소년은 속삭였다. 아니, 이중적인 것들이랑 추리 소설만 그렇지 다른 건 이제 익숙해졌어.

“왜 웃어.”

“그냥, 옛날 일이 떠올라서.”

“무슨 옛날 일?”

소녀는 말없이 웃었다. 이곳에선, 흔적도 없이 지워진 일. 내가 사실은 그와 같은 중학교에 다녔고, 이 고등학교에서 같은 반이었다고 한들,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해서 그 무엇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소녀는 잘 알고 있다. 몇 번이나 돌려진 시계바늘이다.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이전의 가족에게, 친구에게 소리쳤지만 그들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는 전화기를 꺼내 경찰에게 전화를 하셨다. 여기에 웬 정신병자가 있다고.

“너 무슨 신비주의냐?”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겠다.”

종이 울렸다. 익숙한 선율에, 소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소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점심시간이 끝나기 5분 전에는 음악실로 갔다. 학교에서만 이런 커다란 피아노를 칠 수 있다며. 항상 검은색, 흰색 두 대 중에 흰색 피아노의 건반을 눌렀다. 예뻤는데.

“피아노, 오늘은 안 쳐?”

“나 피아노 그만 뒀는데?”

“에?”

그제서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신과 거래를 하기로 한 날, 소녀는 주머니에 만 원 지폐를 몇 장 넣었다. 6월 1일, 소년의 피아노 콩쿠르. 가지 못하니 적어도 뭐라도 사서 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언제나 5월 31일의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알 것 같아. 자신이 없는 이 세계에서, 그는 피아노를 그만 뒀던 거구나.

“중3 겨울이었나. 그 때 그만뒀어.”

소년과 소녀가 만났던 계절.

“미안해.”

만약 소녀가 신을 말리지 않았다면, 중학교 3학년 때 그를 만났다는 과거가 있다면, 그는 계속 피아노를 하고 있었을까?

“왜 네가 미안해? 아, 잠깐, 거기 나와 봐.”

소녀가 물러나자, 소년은 가볍게 담장을 넘었다. 자주 했던 일이다. 학창시절에 해보지 않으면 언제 하겠어. 취직하고 이런 거 하면 월급도 못 받고 잘릴 게 분명하다니까. 4월 언젠가, 소년의 말.

“수업 안 들어?”

“대학 갈 생각 없으니까 별로 상관없어. 여기 있으면 체육한테 들킬 텐데……. 우리 집 가자.”

혹시 평범하게 살던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면, 꼭 말해야지. 이제 막 만난 애를 집에 들인다니. 도둑질을 하고 도망갈지, 집을 더럽힐지 어떻게 안담. 응, 조그맣게 대답하면서도. 히쭉, 웃음이 났다. 아마 자신이, 그 ‘막 만난 애’여서가 아닐까.

한 번도 소년의 집에 가본 적이 없다. 사귀는 사이였지만, 서로의 사생활이 만들어지는 공간에는 접근하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소년의 집이 언덕에 있다는 건, 친구의 입으로 엿들었다. 하지만 또, 자신의 부재로 인해 무언가 바뀌지는 않았을지.

소년은 소녀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먼저 나섰다. 소녀의 걸음이 조금 느렸다. 너무나 꽉 잡은 나머지 팔이 아파왔다. 그래도 괜찮아. 모퉁이를 돌고, 계속 걸었다.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의 눈이 잠시 자신들을 향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상하게 보일까. 이 꾀죄죄한 모습만 어떻게 하면 완벽할 텐데. 마치 데이트 같다. 이 처지가 된 후, 몇 번이나 꿈에 그리던.

“있잖아, 생각해보니까 너, 내가 피아노 쳤던 거 어떻게 알았어?”

“감이야.”

“아니, 솔직히 말해. 우리 어디선가 만났어?”

그 이야기는 조용히 묻혀 가면 좋은데. 소년과 소녀는 계속 걸었다. 항상, 언제나 누군가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리고 싶어서 머리로 정리를 해왔지만, 지금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기도 했고. 세계를 부수려는 신에게 그러지 말라고 소리쳤다가 저주받아 세상에서 그 존재가 없어져 버린 여고생이라. 정말 심각한 중학생들도 하지 않을 설정이네. 그리고 자신은 그 여고생의 남자친구였다는 설정이었다면, 얼마나 이상할까. 억지로 만들어낸 것 같잖아. 그런 이유만은 아니지만.

“정말 감이야. 아, 그리고.”

소녀는 걸음을 멈춰, 소년의 손을 팔에서 떼어내고 제 손으로 옮겼다.

“손가락이 예쁘니까?”

“그냥 말을 말자.”

소녀는 머쓱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모퉁이를 그냥 지나쳐 몇 걸음 더 걸었더니, 여기가 언덕이라고 말하듯 아래로 향하는 비탈길이 거리에 죽 늘어져있었다. 이 쪽 와보고 싶었는데. 소년의 집이 이 근처라기보다는, 그냥 언덕이라는 곳을 가보고 싶었기에.

"여기, 우리 집."

벽돌 담벼락으로 쌓인 단독 주택 앞에서 발을 멈췄다. 와아. 태어나서 줄곧 아파트 단지만 보며 산데다, 친구의 집이라고는 가 본적이 없으니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낮은 곳에서도 사람이 사는 구나 싶기도 하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자, 시멘트 바닥으로 기워진 내부가 드러났다. 영화에서나 보던 잔디밭을 기대했었는데. 그래, 영화는 영화지.

현관문이 열리자, 소녀는 소년의 등 뒤에 몸을 숨겼다가 살며시 얼굴을 내밀었다. 아. 오랜만이다. 사람 사는 곳. 소년의 냄새가 났다. 소년이 타왔던 트로피가 몇 개 전시되어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모르는 이름도 섞여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대학생 언니가 있었지.

살던 곳은 벽에 벽지를 붙였는데. 이곳은 하늘색 페인트가 발라져 있다. 햇볕도 의외로 잘 들어온다. 발로 신발을 끌러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언가를 구경할만한 새로운 공간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다. 새로운 교실은 대충 예측할 수 있었고, 그동안 잠을 청하던 곳은 쥐가 나올까 무서워 구경할 틈도 못 누렸으니.

"일단 씻어. 옷은 준비해 줄 테니까."

"씨, 씻어?"

"너, 냄새 나는 거 설마 모르냐?"

"……알지만."

며칠이나 안 씻었더라. 가끔 학교 샤워 부스에 몰래 들어가 샤워를 하기는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외모에는 별로 신경을 안 쓰고 살았다. 지금도 코를 팔목에 대면 심한 냄새가 난다. 별로 인식하지 않았으니, 코가 냄새 맡기도 귀찮아져 버린 걸까. 하지만 남의 집에서, 그것도 남자랑 같이 둘만 있는 이곳에서라니. 만약 엄마가 알았다면 얼마나 화를 냈을까.

"얼른."

"하아, 알았어."

 

덜렁거리는 관절, 곧 부러질 것만 같은 다리. 금 사이로 잘잘한 살점이 기어 나와 바닥 위로 흐트러지고. 그 빈 공간을 붉은 액체가 채우려 들지만, 좁은 공간에 있는 것은 저도 사양이라며 피부를 스멀스멀 흘러 나와 세상으로 흩뿌려졌다. 약간의 충격만 줘도 이렇게 무너지는데, 곧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신의 저주는 그렇게까지 강력한 걸까. 누군가를 죽여가면서, 정신만은 또렷하게 살려놓을 정도로 그렇게 굉장한 걸까.

수도꼭지가 돌아가는 소리, 물이 땅을 적시는 소리, 너무 뜨겁다며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온 것은 하얀 안개로 변해 공기 중을 떠돈다. 물은 소녀의 가슴을 핥고 스윽 지나가 하수구로 빠진다. 손에 잡히지 않아. 자유롭다. 소녀와 다르게.

상처로 물이 들어가면 아플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 반대인걸까. 피가 멈추지 않는다. 물도 그렇다. 발등을 적시는 물은 붉은색인데, 어째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샴푸를 꺼내 머리에 거품을 내고, 두피에 닿지 않게 린스를 바르고. 머리가 많이 꼬여서 아플 바에는 차라리 잃는 게 낫다는 생각에 반 정도를 가위를 꺼내 잘라냈다. 가슴 밑까지 내려와서, 목표인 허리까지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해야 할까. 머리 정리까지 할까 하다가, 가위를 정리했다.

피는 멎지 않는다. 교복이 더러워진 이유 중 절반은 이 피다. 교복에 묻어 딱딱하게 말라버리니, 하얀 블라우스에 누렇게 딱지가 지는 거다. 큰 소리로 구급상자를 달라고 할까 하다가, 조용히 화장실 문을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거실에는 아무도 없고, 구급상자는 손에 닿을 곳에 있다. 샤워를 마친 소녀는 붕대를 꺼내 팔부터 촘촘히 감기 시작했다. 티가 안 나려면 전신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나. 연고를 바르지는 않는다. 어차피 낫지 않을 걸 알고 있으니까. 이건 벌이야. 그것도 신이 말이지.

웃긴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만났더라.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에 가는 길에, 아파트 근처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던 꼬마. 평범한 개구쟁이처럼 생긴 꼬마와 눈이 마주쳤을 때, 뇌에 한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신. 안 그래도 무신론지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그 한 번만으로도 신의 존재를 인정해버린 건 뭘까.

차라리 일기장에 휘갈겨 쓰기라도 하면 속이 편할 텐데.

구급상자 안쪽에도 붕대가 많이 있어 계속 감았다. 이 정도 양이면 심각한 병에 걸린 중학생 놀이를 하기에 딱 좋은데.

후회된다. 왜 조금이라도 많은 친구를 사귀지 못한 걸까. 조금이라도 추억을 만들려고 하지 않은 걸까. 체육대회, 사생대회. 수학여행도 어울리지 못할 것 같다는 그 느낌에, 소녀 혼자만이 교실에 남았다. 그래도 괜찮으니까. 그 때는 그게 제일 편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돌아서면 아무것도 없다. 흔한 화장실의 칸막이. 버려진 소파의 위. 학교 하면 떠오르는 행사의 기억은 항상 저런 언제나 볼 수 있는 것에서 끝난다.

아니, 그래도 그게 도움이 되는 때도 있었다. 중학교 3학년, 겨울. 소년과 만난 날. 좀 더 많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생각에, 일기장에 잔뜩 그림을 그려 넣으며 시시덕거렸던 나. 서점에 가서 책을 몇 권 더 골라, 이 정도 읽으면 좀 더 웃을 수 있을까 생각했던 나. 그동안의 적은 대화로 소녀는 이야기하다가도 흥분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즐거웠는데. 앞으로 몇 시간동안 이야기도 못 나누다니.

“옷, 두고 갈 게.”

소년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린다.

당연히 예고를 진학할 줄 알고 ‘고등학교 어디로 갈 거야?’라는, 오히려 질문한 자신이 섭섭해지는 말은 하려들지 않았다. 이 시간만이 유일한 놀이터. 한 달 반의 짤막한 여행. 한 때는 같이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 연인들이 영화를 보러 가는 것 같은 느낌이라, 혹시 나 얘 좋아하는 거 아닐까 하고 웃어 버린 적도 있었다. 사실, 정말로 좋아했던 거지만.

소녀는 소년이 치던 피아노를 좋아했다. 11월의 소년은 피아노를 그만 두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을 치면 더 편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며. 소녀는 소년을 막았다. 편해, 편하지만 네가 돌아봤을 때, 자신은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어? 앞으로도 행복할 거라고 말할 수 있어?

우리가 흔히 아는 유명한 한 음악가는 긴 여행을 나섰다. 소녀는 소년을 여행에 나서게 했다. 결국 피아노를 그만두지 않았다. 이곳의 소년과 다르게.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 고등학교 들어와서의 첫 무대. 12월 달에 생일이 있었던 소녀와 달리, 소년에게는 한 번도 축하한다고 말 해보지 못해서. 뭔가를 받았으니까, 적어도 그 정도 이상으로 돌려주지 않으면.

마지막 붕대의 매듭을 지었다. 하얀 붕대는 벌써 피를 머금어 얼룩덜룩해져가고 있다. 그래도 옷에 물들게 하지는 않겠지. 문을 열어 손으로 잽싸게 옷을 집에 들어서는, 하나하나 입기 시작했다. 사이즈, 의외로 작아. 그리고 꾸깃꾸깃 해.

“이거 누구 옷이야?”

“누나 옷.”

보통 옷을 이렇게 주름 많게 개어두나. 오랫동안 구겨져 있었던 옷일까. 약간 먼지 냄새도 나는 것 같다. 으, 싫어. 하지만 입을 수밖에 없어.

“이리 와, 내 방 안내해 줄 게.”

이 집이 아파트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단독주택이라 땅이랑 가까이 있다는 것도 있지만, 집 안에 계단이 있다는 것도 그랬다. 웬만한 서민 아파트에는 없는 것. 강남 부자 댁에는 있을까.

“아, 피아노다.”

들어가자마자 피아노가 눈에 띄었다. 이쪽은 검은 피아노.

“피아노 쳐 줘!”

“뭐? 안 돼. 벌써 그만 둔지 6개월이라고. 손가락도 다 굳었을 거고…….”

“나도 피아노 쳤던 적 있어.”

분명 6살 때였나. 유치원에서 따로 피아노 수업을 듣는 아이를 따라갔다가, 저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며 부모님께 조르고 졸라 들어간 피아노 학원. 소녀도 소년과 같이, 피아노에 열심이고 콩쿠르 준비에 불타올랐던 적이 있었다.

“5학년 때 그만 뒀지만. 그래도 봐, 집에 피아노도 없어서 몇 년이나 연습해 본 적은 없는데 대충 작은 별 변주곡 정도는 칠 수 있다고.”

피아노 뚜껑을 들어, 16분음표가 계속 이어지는 좋아하는 마디부터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음, 꽤나 좋아한다. 왼손이 별로 움직이는 것 없이, 오른손만 건반을 떠돈다. 땅에 남아 미동조차 없이 감탄사를 흘리는 사람, 그리고 하늘에서 그들보다 더 높은 소리로 빛나는 별. 그 부분이 끝나자 손을 내려놓았다.

“봐. 나도 이런 데, 고작 6개월은 좋아하는 곡을 못 치기엔 너무 이르잖아?”

“하아,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나와.”

이곳의 소년은, 5월의 소녀 앞에서 처음으로 피아노에 손을 올려놓았다.

 

“멋있네!”

처음 나온 말은 그거였다. 악보도 보지 않은 연주. 6개월은 많은 것을 잊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다. ‘악보의 지시대로’는 무시되었지만, 그래도. 소녀는 소년이 피아노를 눌렀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만 뒀으면, 다시 치면 돼. 그 때도 나를 위해 쳤으니까, 지금도 나를 위해 쳐 줘.

“좋은 생각 떠올랐다!”

“뭘…….”

“3일 뒤에, 콩쿠르를 열거야, 바로 이 홀에서! 심사 위원이자 개최자는 나, 그리고 너는 참가자!”

“아무 의미도 없잖아, 그거. 혼자 참가라니.”

아니, 의미 있어. 소녀는 웃었다. 언제나 계속되던 5월의 마지막, 소녀는 소년의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콩쿠르 힘내, 못 가지만 응원 할게.’ 콩쿠르는 신청하면 다 나가니, 나가는 걸 축하하는 건 참 이상해보여서. 이번이야 말로 축하한다고 말할 수 있어.

“그럼, 참가하면 나는 뭘 얻는데?”

“원하는 거라도? 돈이 드는 건 사양하겠지만.”

“음.”

소년은 고민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뭐가 좋을까.

“너에 대해서 들려줘. 애매한 거, 딱 싫어서.”

“응, 알겠어!”

너 답네. 소녀는 소년의 손을 꽉 잡았다. 내가 없기에 많이 변해버린 이 세계의 너도, 여전한 것은 남아있어. 정말로.

 

소녀는 붉은 장미를 한 아름 안아들었다. 얼마요? 삼 만원. 남은 돈으로 뭐 먹고 싶었는데. 소녀는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구겨진 만원 지폐를 꺼냈다. 자, 삼 만원이요.

 

소년이 며칠이라도 좋으니 집에서 머물다 가라는 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집을 나갔다. 변한 것, 변한 것. 살던 집에 돌아가 담벼락 너머를 넘보기도 하고, 학교 수업 중 창문에 얼굴을 기대기도 하고. 인간이란 건, 생각보다 작은 존재다. 70억이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달라졌다고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아. 변한 건 거의 없었다. 화분의 배치나, 소녀의 물건 같은 것만 빼면.

다행이다. 이 세계는 자신 없이도 괜찮구나.

 

소년은 점심시간, 연습을 시작했다. 그래봤자 10분 남짓, 아주 적은 시간이지만. 소녀에게 맞춰 줄 의무는 없다. 소녀가 자신에게 그렇게 할 권리조차 없다. 다만, 이유가 있다면, 그러게, 이유는 없는데. 왜지. 왜 나는 피아노를 치고 있는 걸까.

소년의 누나가 죽었다. 이 콩쿠르만 마치고 해외에 나갈 거라고, 조금이라도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고 나가고 싶다고.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매일 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연주. 좀 자라며 억지로 눕히면, 몰래 연습실로 가서 연습을 하기도 했다. 대회당일. 사고사였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렇게나 연습했는데. 나라에서 제일 큰 무대, 10대를 장식할, 이 나라에서의 연습을 장식할 최고의 무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음악은 안정적이지 않다. 감정에 동요되고, 팔리지 않을 때면 위장의 굶주린 소리를 들으며 연주를 이어나가야 한다. 그냥 편안하게, 안정적이게 살다가 가면 얼마나 좋아. 취업만 고생하면 돈은 정기적으로 나오는 게 얼마나 좋아. 그런 비관적인 눈빛으로 모든 것을 봤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조촐한 첫 연주회. 이건 좋은 징조일까. 나쁜 징조일까. 전혀 모르겠어.

 

연주가 끝났다. 옷도 교복 그대로, 아직 흐려지지 않은 볼펜 자국이 손에 선명하다. 평범한 콩쿠르라면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평범하지 않은 콩쿠르 무대에 섰다. 손끝이 건반소리로 먹먹하다.

“음.”

소녀는 고민하던 표정을 짓더니,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가 미소 지을 줄 알았던 소년은 눈을 크게 떴다.

“축하해, 네가 1위야.”

축하해. 하고 싶었던 말. 6월에 열리는 콩쿠르, 소녀에게 있어서 소년의 1위는 이미 정해져 있는 미래나 다름없었다. 저렇게 잘 치는데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며, 꽃다발을 줄까, 편지도 같이 줄까 고민했었던 날들. 부서지기 전에 챙겼던 것도, 그의 선물을 사기 위한 돈. 그가 2위를 하던, 예선에 떨어지던, 소녀는 그런 것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넌 항상 탑이야.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왜 울어.”

“아니야, 안 울어.”

눈에 잔뜩 고인 눈물을 옷소매로 훔쳐냈다. 안 울어. 이렇게 기쁜 날에 울면 되나. 웃어야지. 입술이 떨린다. 끝이 올라가지 않아. 귀에 걸리는 건 무리니까 그 중간까지만 올리자며. 자꾸 얼굴이 구깃구깃해진다. 이런 얼굴, 보이고 싶지 않은데.

“자!”

한 번도 받아준 적 없는 꽃. 한 번 정도는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으니까. 받아줬으면 생각했으니까.

4월, 소년에게 고백했다. 네가 좋아. 나랑 사귀어 주라. 그 말에, 소년은 말했다. 미안해. 네가 피아노를 계속 하게 해 준 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 나도 네가 좋아. 하지만 좀 더 피아노에 집중하고 싶어. 6월에 콩쿠르도 있고. 그러자 소녀는 외쳤다. 그럼, 콩쿠르 이기면 나랑 사귀자!

소년은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고, 고마워.”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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