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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왕자인가요?”

“당신의 기사입니다.”

 

명령으로 이어진 만남이 그러하듯 대부분 의례적인 대화였지만 남자는 첫 만남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중 유난히 남았던 것은 소녀가 한참 동안 자신을 살피다 뒤돌아 먼저 걸어가고, 소녀가 지닌 시선의 궤적을 따라 옮겨간 끝에서 불꽃처럼 일렁이던 머리카락을 한참 바라보다 자신을 쥐어박은 선배에 의해 서둘러 그 뒤를 따라간 상황.

 

그날의 상황은 평범해서…. 아니, 평범했던가?

 

지상 너머로 저물어가던 불빛과 또 다른 불꽃이 마주치는 풍경은 평생 잊지 못할 종류 일터인데? 그날 이후로 청년은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검으로 곁을 지켰다. 그동안 변치 않을 것 같던 소녀는 꽃이 피어나듯 여인이 되었고, 긴 시간 동안 가문과 자신의 기사단을 책임지게 된 남자는 충성이 연모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아, 그녀라면 괜찮을지도’란 마음과 함께 고귀한 신분을 가진 이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할 일은 없을 테니까. 대신 온전히 저한테 쏟아지던 신뢰와 애정, 내밀어 지는 손길과 함께 웃는 모습 속에서 남자는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홀로 두지 않겠습니다.’

 

 

ㅡ 쾅

 

 

수없이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의 오전.

매처럼 날아든 전령이 전해준 소식으로 회의장은 한차례 소란이 일었지만 둔탁한 큰 소리로 인해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 그 중심에서 입가를 굳게 다물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던 남자, 새뮤얼은 자신의 앞까지 굴러온 잔을 붙잡아 다시금 세웠다. 물이 없던 것이 다행이었나?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세요?”

 

아니, 다행은 아니었을지 모르겠군.

어릴 적부터 모셔온 주인은 부정한 것을 태우며 길을 만들어내는 종류의 불꽃이었다. 비록 진홍색과 가까운 풍경은 세간에서 말하는 신성하기보다 위엄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러 생각을 하며 잔을 바라보던 남자는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전령이 급히 잘라낸 듯 일부분이 떨어져 나간 쪽지와 탁자 위의 지도에 시선을 뒀다.

 

표식, 모형, 통계. 왕국의 [내전]이 시작되기 전에도 익숙한 종류였지만 시작된 이후 더 익숙해진 그것들은 검과 검이 부딪치는 전장에서 필수적인 종류였다. 기사들이 검을 쥐고 휘두르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용하여 전략을 짜는 자에 따라 그 효력은 달라지니까. 회의 도중 찾아든 전령이 전해준 소식은 간단했다. 왕국의 중심, 수도 내부의 깊숙한 곳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비밀통로의 존재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그런 내용. 하지만-

 

“비밀 통로의 존재를 전해 들었지만, 확보하진 못했다니요.”

 

그녀를 분노케 한 것은 현시점에서 존재만 ‘파악’했다는 점이었다. 처음부터 소규모로 움직였기에 왕국 군의 수와 비교하면 죽은 이가 적다는 것은 인력이 부족한 자신들에겐 다행이지만 말 그대로 결과로 만들어져야 정보로서 가치가 있는 법이었다. 전령이 전해준 비밀통로에 대한 정보를 듣고 반짝이는 수많은 눈이 왕국의 前 공주이자 내전의 중심이자 반란군의 수장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왕이 가질 수 있는 권한까지 자신이 알 순 없는 법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애초에 비밀통로를 들을 만큼 우애가 깊었다면 지금의 전 불효자식이겠어요? 하는 비아냥거림과 함께- 그녀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내도록 하세요.”

 

명령이 내려지면 따라야 한다. 불(fire)과 같이 전달 된 말에 덴 듯 몸을 떨며 일어난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후 나가는 풍경 속에서 기밀 정보들을 정리하며 고민에 빠진 여인을 바라보던 새뮤얼은 옆에서 도왔다. 처음 맹세했던 그 날처럼 자신은 검이었고 묵묵히 옆을 지키는 것이 허락된 전부니까. 여인의 가녀린 체구를 감싸며 굽이쳐 흐르는 진저 브라운 빛 머리카락에 시선을 뒀다. 다음으로 늘 짓고 있던 미소가 사라진 입가. 마지막으로 시선의 끝에 닿은 것은 ‘비밀통로’ 부분에서 굳게 가라앉은 여인의 눈이었다.

 

자신의 불꽃. 타오름에 눈이 멀다 한들….

 

“주군”

“둘이 있을 때 로이나라고 부르기로 했잖아요.”

 

그 사실에 의미를 둬야 할까. 클로이 탤벗. 허락받은 ‘로이나’라는 애칭을 들었음에도 새뮤얼은 굳게 침묵을 지켰다. 반쯤 열린 회의장 문이 원인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왕좌를 향해 걸어가는 것에 괜한 소문을 돌게 할 수 없으니까. 자신의 반응에 말없이 어깨를 으쓱인 클로이는 정돈하던 것을 건넸고, 새뮤얼은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

 

익숙함 속에서 이어진 침묵. 기사라면 누구나 꿈꾸지 않을까. 단 한 사람을 향한 변치 않을 신뢰와 맹세. 이것으로 여인의 어린 시절 한 쪽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받았지만 동시에 그녀가 상처받아가는 과정을 목격하게 되었다. 상처 입은 동물은 그 무엇보다 조심해야 하는 존재. 그 말처럼 받은 행복과 웃음의 무게만큼 그녀는 같은 불행을 짊어지게 되었지만 [고귀한 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말하며 웃음 지었다.

 

‘검으로서 그 미소를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언제부터 이렇게 깊어지게 된 걸까? 물음과 함께 첫 만남처럼 제 앞에서 일렁이는 풍성한 머리카락은 늘 자신을 생각에 잠기도록 만들었다. 물론 이런 생각을 들으셨다면 주군은 말로 뱉어도 된다고 허락하시겠지만…. 글쎄, 새뮤얼은 말없이 반걸음 뒤에 서 있는 것으로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어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구원이란 거창한 이름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종류.

 

“로이나”

“응? 왜 불러요. 새미.”

“비밀통로를 찾아낸다면-"

“당연히 가야죠.”

“…직접 말씀입니까.”

“왜요?”

 

‘저는 주군께서 보류해주시길 바랍니다.’ 로 이야기를 꺼낸 새뮤얼은 천천히 자기 생각을 얘기했다. 억압이 아닌 설득. 물론 그녀가 내부를 섬세하게 잘 아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이 왕국의 공주였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점을 이용하려고 한다면? 그녀는 불꽃이었다. 하지만 환한 빛을 보고 날아드는 이들이 있기 마련. 거기다 정보는-

 

“손에 얻는 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니 일부러 흘린 걸지도 모릅니다.”

“새미, 그건 나도 알아요.”

“아시는데 가시겠다고 하십니까. 검을 잡고 계신 것은 당신입니다.”

“검은 중요한 곳에 써야죠. 아끼는 것은 보검밖에 되지 않으니까. 거기다….”

 

이어질 뒷말을 기다리듯 시선을 마주치자 아까보다 퉁명스러운 빛을 띠는 눈동자가 마주쳤다. 언제나처럼 새뮤얼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그 모습에 여인은 어딘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그녀가 다른 여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자와 같은 용기. 오소리의 영악함. 하늘의 독수리가 가진 지혜. 그리고 뱀과 같은 야망. 그렇기에 뒤에 설 수 없게 된다 한들 당신 혼자서라도 낮을 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전 괜찮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려 했는지 어떻게 알고요?”

 

클로이는 남자를 바라봤다. 한 발짝 물러서 있는 남자는 늘 자신의 위험에 민감하게 굴었다. 충직함도, 올곧다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럴 때마다 섭섭하게 느껴지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을 꼭 말로 꺼내 확인시켜주는 점이 아닐까.

 

“제가 보검이 아니란 사실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주군.”

 

클로이는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새뮤얼 실바누스. 자신의 검.

돌아오라 명령한다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맹세한다.

 

새뮤얼은 클로이와 시선을 마주쳤다. 클로이 탤벗. 자신의 주인.

고귀한 피를 가졌기에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하는 불빛.

 

두 사람의 생각이 교차하는 것은 잠시뿐 클로이는 몸을 돌려 말없이 먼저 걸어갔다. 새뮤얼은 클로이의 모습을 바라보다 그녀의 걸음 앞에 서 있을 호위를 향해 가볍게 고갯짓을 한 뒤 문서들을 가져다 놓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자신이 돌아올 곳은 그녀가 명령한 순간부터 한군데밖에 남지 않았다.

 

이건 욕심인가? 누군가는 이 감정을 사랑이라 정의했고, 누군가는 충성이라 정의한다. 자신은 그녀를 인형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숨 쉬고, 웃고, 우는 그 모습을 그 자체로 보고 싶다는 마음은 욕심으로 이어진다. 당신에게 더 어울리는 것은 밤이 아니라 낮입니다. 눈동자를 보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 중 하나. 처음 소녀의 앞에 섰을 때 깊은 바다에 잠기는 기분이 들었을 정도니까.

 

‘당신은 오늘부터 새미에요. 나는 로이나 라고 불러줘요.’

 

충성을 맹세하기 전 방을 지켰을 뿐인 자신을 몇 번 유심히 살펴보더니 언젠가 그녀가 툭, 내뱉고 먼저 걸어간 적이 있었다. 충성을 맹세한 이후 ‘오늘도 대화할 생각이 없는 거예요?’ 하고 시선을 마주치려 노력하기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마주치자 손이 잡혔고-

 

맞닿아진 그녀의 체온은 따스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생명을 앗아가는 것은 제가 할 일입니다.’

‘손에 피 묻히는 걸 망설인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요. 날 겁쟁이로 만들 건가요?’

 

여인은 그 순간에도 웃고 있었기에 자신은 한참이나 말을 고른 적이 있었다.

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피를 쫓다 보면 피밖에 남지 않습니다. 붉은 것은 점차 검게 변해가고 그건 주군을 삼킬 것이 분명하죠. 당신은 분명 강하지만 그 누가 소중한 사람을 자신이 서 있는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싶겠습니까.’

 

후에 그 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여인은 그렇게 낭만 없는 고백은 처음 들었다며 솔직하게 말해주었지만, 자신은 고백이 아니라고 말한 뒤 쓴웃음을 짓게 될 뿐이었다. 당신은 알까? 언제나 당신에 의해 피로 검게 변해 형태를 찾아볼 수 없는 손가락의 윤곽을, 위치를, 깨닫게 해준다는 사실과 함께 불꽃으로 당신을 정의할 수밖에 없다고.

 

“후유….”

 

새뮤얼은 클로이의 집무실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 주변을 둘러봤다. 필요한 가구만 갖춰져 있는 방. 언젠가 자신이 선물해준 장식품들을 제외한다면 내전의 흔적만큼 살풍경한 모습이기에 새뮤얼은 그녀에게 꽃을 선물해야 한다고 기억 속에 새기며 기밀을 포함한 문서들을 금고 속에 넣은 후 잠갔다.

 

용무가 끝난 이상 그녀가 없는 방에 더는 머물 필요가 없었다. 새뮤얼은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들에게 항상 부족한 것은 시간이란 사실을 알고 있어 바닥을 두들기는 발소리는 점차 빨라졌고, 새뮤얼은 방에 들어서선 언제든 싸우러 나갈 수 있도록 제자리에 놓아둔 장비들을 챙겨 입었다. 물론 그 위로 위장을 위한 허름한 셔츠를 덮어 입는 것도 잊지 않고- 준비를 마친 후 지도를 들고 나가려는 찰나 새뮤얼은 창가에 놔둔 붉은 장미에 시선을 뒀다.

 

붉은 장미는 가문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며칠 전 클로이가 어울린다 말하며 선물로 주었기에 병에 물을 담고 놔둔 참이었다. 사실 생전 처음 받은 장미꽃인지라 어리둥절했지만 신하인 자신을 치하하기 위해 내린 것으로 생각해 받아들고 감사하다 인사를 건넸고, 그 후 시장을 지나던 중 보인 꽃을 그녀에게 선물로 준 참이었다. 노랗고 작은 꽃을.

 

그때 꽃집 아가씨가 넌지시 말해준 꽃말은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었던가.

 

천천히 생각을 갈무리하며 걸음을 옮긴 새뮤얼은 클로이가 있는 방의 문을 노크한 뒤 허락의 말이 떨어진 후 들어선 문턱 안에서 마주친 풍경을 묵묵히 바라봤다. 자신의 주군, 왕국 내에서는 붉은 마녀라 불리는 여인. 강렬한 불꽃. 그녀의 머리 위에서 빛나야 할 왕관 대신 귀 뒤로 쓸어 넘기고 있는 머리카락은 창가 너머에서 들어온 빛과 함께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랬다. 자신은 이 모습에….

 

“새미?”

“…….”

 

늘 해야 하는 말을 잃곤 했었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요?’

‘낯선 그것에 저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말을 걸었을 때 부서진다면 어떻게 하죠?’

 

새뮤얼은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고, 잃어버렸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꺼냈다.

 

“외출을 허락받기 위해 왔습니다.”

“새뮤얼 실바누스. 지금 뭐하는 거죠.”

 

결론 혹은 무언가를 위한 과정. 봄의 문턱에서 핀 꽃이 겨울이 지나 빛이 될 수 있도록 기사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주군이 가겠다 말씀하신 길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유일했다. 그게 설령 죽음으로 이어져도 해야만 하는 일이다. 시야로 자신의 말에 드러나게 찌푸려진 표정이 보였다. 미움을 받을 수 있다 생각이 들었지만… 상관없다. 미움을 받아도 그녀의 화가 풀릴 때까지 자신은 몇 번이나 돌아올 테니까.

 

“주군께서 나갈 길을 알아보러 나갈 생각입니다.”

“혼자서?”

“네.”

“보호자 노릇이 싫으면 말로 하지 그래요.”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찌푸려졌던 눈가는 어느새 펴진 채 말없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새뮤얼은 손을 뻗어 자신의 앞에 있는 이의 손을 잡고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돌아오겠습니다.’라는 말 대신 보이는 약속. 문장에 소질이 없기에 표하는 방식-

 

“…좋아요. 다녀와요. 대신 살아서 돌아온다는 걸 전제로 명령합니다.”

“네. 주군.”

 

살아 돌아오라 명령받는다면 행한다. 자신은 붉은 장미와 사자의 문장을 짊어진 가문의 수장일뿐더러 전쟁터에 있길 명령받는다면 벗어나선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 명예를 위해 검을 쥔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 나온 문 뒤로 묵직한 어떠한 소리가 들렸지만, 새뮤얼은 묵묵히 호위에 대한 추가 명령을 내린 뒤 창밖을 봤다. 이제 오후였다.

 

짧은 준비를 마치고 뒷문을 이용해 나온 포석들은 저녁에 다가서는 걸 보여주듯 붉게 혹은 검게 물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 장관이었지만 새뮤얼은 옆에 찬 검을 잡고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믿을 수 있는 이에게 호위를 맡겼다 한들 그녀의 뒤를 오래 비우고 싶진 않았으니까. 수월한 이동을 위해 안장과 작은 짐들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말 위로 올라타 가볍게 등자를 말에 가볍게 부딪치는 것으로 출발시켰다.

 

말발굽 소리와 흙바닥이 부딪치면서 메마른 소리를 낸다. 건조한 날씨로 떨어져 내린 나뭇잎은 기척을 숨겨줄 테고, 남을지도 모르는 자국을 가려줄 것이다. 만약에 대비해 땔감으로도 쓸 수 있겠지. 싸움이 시작된 이후부터 새뮤얼의 생각은 늘 전장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반란군’

왕국 사람들의 입장에서 불리는 호칭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주군은 왕위에 대한 욕심으로 제 아버지를 향해 검을 겨눈 공주라 소문이 났지만 정작 국민은 왕족의 싸움에 관심 두기보다 자기들의 몫으로 할당된 세금 걱정을 하는 것이 우선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반란군에 합류한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그들은 소문을 듣고 모였다. 동시에 중심에 있는 그녀는 목적과 함께 ‘해야 하는 일’이라 칭했다. 해서 자신은 그녀에게 말없이 검을 바쳤다. 왕좌와 왕관을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행동할 것임을.

 

“조용하군.”

 

해가 저물고 별이 기울 듯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점을 제외하곤 말을 타고 달려가는 동안 주변에 머무른 고요함과 함께 숲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동시에 새뮤얼은 정보와 함께 전달받았던 지도를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둘러볼 후보지를 추려낸 뒤 말 위에서 내렸다. 어차피 이곳은 낮에 와도 어두운 곳인지라 좋지 않은 소문이 있어 쉽사리 접근하는 이는 없겠지. 수풀이 무성한 곳에 말을 묶은 뒤 나온 바깥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나뭇잎 틈새로 별의 개수가 더 늘어난 상태였다.

 

“서둘러야겠군.”

 

은밀하게 움직이려면 시간이 배로 들어갈 테니 적어도 샛별이 떠오를 무렵에 이곳으로 돌아와야 후보지를 제외한 곳으로의 이동이 수월할 터였다. 누군가는 말하곤 한다.

 

‘왜 같은 왕국 사람들끼리 피를 흘려야 해?’

 

기사로서 말하자면 그건 이상일 뿐이다.

몰아치는 적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주변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첫 번째 후보는 숲 근처에 있는 유적지. 두 번째 후보는 오래전 폐쇄 된 경비 탑. 세 번째. 빠른 걸음과 함께 많은 곳을 거치면서 발견한 곳은 없었지만, 새뮤얼은 마지막 후보를 떠올렸다. 초기 왕국의 신화와 함께 전해져 내려오는 종탑. 왕국을 처음 세울 때 발견한 광석으로 종을 제작했지만 건국왕 이후로 누구도 울릴 수 없어 방치된 곳.

 

그곳으로 걸음을 옮겨 말을 묶어놓는 그때 새뮤얼은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검을 꺼냈다. 누군지 확인하자 보인 것은 궁의 내부에서 몇 번 지나치면서 봤던 익숙한 얼굴. 새뮤얼은 망설임 없이 상대방도 검을 꺼내 든 모습에 달려들었고 캉, 하고 메마른 소리가 주변을 집어삼키듯 울려 퍼지는 걸 들으며 소리 없는 한숨도 같이 삼켰다.

 

“대장!”

“지금은 아니다. 호칭을 정정하도록”

 

짧게 말을 마친 새뮤얼은 맞은편에서 당황한 얼굴로 검을 맞댄 이를 제외하곤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기에 반걸음 정도 물러서며 마주쳤던 검을 겨누며 경계했다. 반란군과 마주친 일로 순찰을 나왔다면 돌려보낼 수 없었다.

 

“돌아오십시오. 왕궁에서 대장을 그리워하는 녀석들이 많다고요.”

“그런가.”

“대장도 그 붉은 마녀한테 홀리신 겁니까? 네?”

 

왕국 내에서 불리는 그녀의 또 다른 칭호에 새뮤얼은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린 걸 피곤 다시 걸음을 내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상대방이 검을 놓치지 않고 겨누듯 찔러 들어오는 걸 흘려보낸 새뮤얼은 대꾸하지 않은 채 묵묵히 상대방의 검을 비스듬히 올려쳐 낸 후-

 

“그년은 마녀입니다. 아시잖아요!”

 

완연하게 물기가 서린 목소리에도 굳게 입을 다문 채 몸을 틀며 그의 가슴팍을 향해 숨겨놓았던 단검을 찔러 넣었다. [붉은 마녀] 이 호칭은 갓 태어난 아기가 가져올 고귀함을 찬양하는 말 뒤로 그녀의 부모에게 점쟁이가 고한 내용이었다.

 

‘아이는 왕국을 태울 붉은 마녀다. 그렇게 태어났고 살다 죽임을 당할 운명의 소유자.’

 

소문을 들었음에도 클로이 탤벗, 왕녀에 대한 새뮤얼의 생각은 여전했다. 그는 들리는 말보다 보이는 사실을 믿었다. 어느 날인가 어렸던 소녀가 말했다. 대신들의 수군거림에 아버지가 몇 번이나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실제로 호위를 서는 중 상대한 자들의 검술은 왕실 기사단 특유의 고풍스러운 종류라서 새뮤얼은 수긍했다. 해서 살아남기 위해 왕위를 차지하겠다고 하는 말에 새뮤얼은 반발 없이 따랐다. 검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고 자신은 그녀가 살아남길 바랐으니까. 더불어 불꽃을 동경했으니까. 망토를 두르고 함께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세상에 물들어 있는 광경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이 자리에 있음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어 새뮤얼은 상대방의 가슴으로 깊숙하게 파고든 단검을 빼낸 후 남자가 거친 숨과 함께 들썩거리며 자신을 향하던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침묵 속에 잦아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몸을 묵묵히 안고 있기만 하던 그는 중얼거렸다. 이제 들리지 않을 테지.

 

“…미안하다.”

 

그 뒤 새뮤얼은 시신을 한쪽에 고이 묻어주곤 종탑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샛별이 찾아올 무렵 새뮤얼은 비밀통로에 대한 정보를 적은 지도를 들고 어둠 밖으로 나와 걸음을 옮기다 자신이 묻은 이를 향해 짧게 경례한 뒤 말 위에 올라탔다.

 

서로가 지키기 위한 것을 위하여 혹은 명예를 위한 싸움은 계속 될 터고 아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받아들인다한들 죄책감 또한 자신의 것이었다. 새뮤얼은 생각과 함께 전체적으로 자신의 몸을 검게 물들인 혈흔을 바라보다 출발했을 때처럼 자신이 가야할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아침이 다가올 무렵에 출발해 완연히 떠오른 태양과 함께 도착한 장소에서 보이는 익숙한 인영에 새뮤얼은 말 위에서 내려와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클로이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뗀 후 바라보며 고했다.

 

“당신 곁에 돌아왔습니다. 로이나(Leuna)”

“돌아와 주어 고마워요. 새미(Sammy)”

 

 

Cela s'est passe. Je sais aujourd'hui saluer la beaute.

그것은 지나갔다. 이제 나는 아름다움에 인사하는 법을 알고 있다.

- 아르튀르 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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