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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천적으로 무언가 결여된 사람이다. 그게 무엇인지, 나의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다.

유복한 집안은 아니었다. 그러나 살아가는데에 문제가 있는 집안도 아니었다. 평범한 부모와 평범한 형제. 평범한 이름과 평범한 생활. 학교를 가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그냥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런 평범한 삶. 그리고 평범한 죽음. 그래서일까, 다시 한 번 삶을 살 기회가 주어진 지금, 그렇게 두근대거나 행복하지 않은건.

삶에 미련이 없는건 아니다. 세상에 미련 없이 살다 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이 그럿듯이 나 역시도 삶에 미련이 남은 사람이다. 해보지 못한 것도, 하고 싶었던 것도 많다. 그러나 삶에 미련이 남았다고 해서, 다시 살게됐을 때 그 모든 미련을 후련하게 떨치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조금 모자랄 때도, 조금 넘칠 때도 있는 생활을 했다. 저번에도, 이번에도. 그저 순응하며 살다가 친구들과 술 한 잔 할 때면 불평도 하고 욕도 했다. 어디에나 있는 그런 평범한 소년 이었고, 평범한 어른이 되었다. 저번에도, 이번에도.

다시 말하지만 나는 무언가 결여된 사람이다. 곱씹어보건데 나의 그 텅 빈 공간은 나를 나약하게 하고, 겁 먹게 하고, 도망치게 했다.

 

"뭐해요?"

"일해요."

"김대리님은 재미가 없어."

"그래요?"

 

명랑한 목소리의 여직원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가 없다면서 왜 웃지. 나는 다시 화면에 눈을 돌렸다. 내 삶을 다시 살게된 지 10년, 나는 이전 삶과 똑같은 학교를 졸업했고, 똑같은 회사에 입사해서, 똑같은 부서의, 똑같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다. 무엇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아, 다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면 젊을 때 복권 당첨 번호라도 외워뒀을텐데. 화면 속 번호와 내 번호를 대조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오늘은 일찍 퇴근할 수 있겠지. 이상하게 일이 적네. 나는 가볍게 목을 돌렸다.

일 하다가 심심하면 다른 것도 하다가 잠깐 졸기도 하니 시간이 빨리갔다. 창 밖에는 벌써 석양이 지고 있었고, 팀장의 자리는 이미 비어있었다. 박경호 이 개새끼, 맨날 지만 칼퇴하고. 저새끼는 한 세 달간 맨날 새벽 2시까지 뺑이 좀 돌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한숨을 푹 쉬며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코트를 입었다.

 

"퇴근하시게요?"

"예."

"저도 이제 막 퇴근하려는데, 김대리님 저랑 저녁 드실래요?"

"아뇨. 죄송한데, 오늘은 제가 집에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저번에도 그러시더니."

"하하, 다음에 일 없으면 한 번 먹어요. 그럼 저 먼저 내려가요. 유정씨."

 

한유정은 나를 좋아한다. 그리고 숨기지 않는다. 문득 발을 멈추고 쇼윈도에 나를 비춰보았다. 어디서 빠지지는 않는 외모지만, 특출나게 잘생긴 건 아니다. 특히 작은 키도, 큰 키도 아니다. 이런 보통의 나를 그녀는 왜 좋아할까. 나랑 눈을 맞추며 밝게 웃던 그녀의 얼굴을 되새겨보았다. 이전 삶에서 나는 한유정과 결혼했다. 1년이 조금 넘게 연애했고, 결국 결혼했다. 다시 되짚어 보면 나는 그녀에게 설렌 적이 없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척을 했을 뿐이다. 그 남자 때문에. 그게 끝까지 못내 미안했다.

문득 그 남자가 생각난다. 어쩌다 나가게 된 술자리서 만난 후배였고, 사근사근하고 재밌는 친구였다. 관심사도 비슷해서 따로 연락도 몇 번 나눴었다. 그리고 남자는,

 

"형."

"머리 치워."

 

불쑥 나타난 녀석은 내 머리 위에 턱을 얹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어깨도 넓고, 잘생기고 젊은 놈. 서른을 훌쩍 넘은 내게는 과분하고 버거운 놈이었다. 나는 저번 생에 남자에게서 벗어나려고 연애했고,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순간에 남자를 상처입혔고 난도질했고 몰아넣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순간에 조금씩 더 비어갔다.

억지로 머리를 밀어내려고 올린 손이 꽉 붙잡혔다. 그의 손은 차갑게 얼어있었다.

 

"형, 추워요.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응?"

 

이전 삶에서 북풍이 치는 겨울 밤, 그래, 오늘, 우리는 처음으로 키스했다. 선명하게 떠올랐다.

 

"밥은 먹었냐."

"응? 아뇨. 밥 먹다가 형 놓치면 어떡하라구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붙잡힌 손을 빼내었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남자는 내 옆에서 따라걸으면서 이것저것 조잘댔다. 저 형이 있는 회사에 이력서 낼 거에요. 거기 가려고 다른데 걷어찼어요! 형! 형! 형! 가게에 도착해서도 그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오늘 유난히 기분 좋아보인다?"

"당연하죠. 형이랑 밥 먹잖아요."

 

신이 나서 국물을 떠먹다, 입안을 다 데어버렸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혀가 얼얼해요 하며 징징거리는 소리를 하길래, 입에 밥을 한 수저 쑤셔넣어줬다.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는 내 생각에 빠져들었다. 전에, 오늘 키스를 하고, 나는 도망쳐버렸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키스는 나를 그와, 그리고 나와 마주하게 했고, 살면서 처음 느낀 사랑과, 사랑에 대한 갈구는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래서 나는 한유정의 곁으로 도망쳐버렸다. 평범한 연애와 결혼과 삶을 위해서. 남자의 사랑을 미친듯이 갈구하는 내가 두려워서 나는 나를 꽁꽁 숨겨버렸다. 이건 내 삶의 가장 큰 미련이다.

두려워서 시작하지 못했다. 나는 항상 그의 사랑에 목 말라했고, 그 모든 공포와 욕심을 혼자 삭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죽음의 순간에 문득 아쉽다고 생각해버렸다. 그를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고 마음껏 사랑받지 못한 걸. 끝내 파국으로 치달아보지 못한 걸.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두려워한다.

 

"준혁아."

 

너는 놀란듯 눈을 깜빡였다. 무척 오랜만인 것 처럼 느껴졌다. 너의 이름을 부른 건. 목이 타서 벌컥벌컥 물을 마시자, 네가 빈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목을 뻣뻣히 굳힌 채 입을 열었다.

 

"끝까지 갈 생각 있어?"

"네?"

 

숨을 삼키며 주먹을 꾹 쥐었다. 주변의 모든 소란이 멀게만 느껴졌다. 이 세상에 나와 너 밖에 없는 것 같았다.

 

"네 젊은 그 치기로 시작한 사랑, 다 말라서 사라져도 나를 사랑할 자신 있어?"

"나는 바닥이 없어. 네가 아무리 나를 사랑해도 나는 절대 만족 못해. 그래도, 계속 나를 사랑해 줄 수 있어? 무한의 사랑을 원하는 나를?"

"나랑 같이, 파국으로 달릴 생각이 있어? 자신 있어?"

 

대답이 없는 너에게, 이번에는 내가 먼저 키스했다. 아무리 주위에 얇은 칸막이가 있더라도, 아무나 고개를 돌리면 볼 수 있는 곳에서, 그저 세상에 둘만 있다고 믿고 키스했다.

너는 말이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고, 나는 소주를 들이켰다. 말없이 소주만 세 잔 째 먹었을 때, 겨우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비겁하잖아요. 나한테 다 달라니. 형은 나한테 아무것도 안 줄거잖아요."

 

부인하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 줄 사랑은 네가 나에게 줘야하는 사랑과 비교할 수 없을만치 작았다. 나는 내가 내 감정을 소비하지 않는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걸 잘 알았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형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도망갈 거라는 거 알잖아요."

 

도망가라고 하는 말이죠? 준혁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를 마주쳤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끝없이 사랑받길 원하지만, 내가 돌려줄 사랑은 고작 한 조각이다. 나는 시작하고 싶었으나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김준혁에게 칼자루를 쥐어주었다. 사랑을 시작하느냐 마느냐는 준혁에게 달렸다.

 

"다음에 얘기해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나는 너를 다시 보지 못 할거다. 다음은 없겠지. 너는 사랑이 흐려질 때 까지 혼자서 사랑하겠지. 나는 조금은 후련한 기분으로 아쉬워할거고, 이번에는 내가 도망친 건 아니라고 합리화하겠지. 그럼에도 나는 계속 비어갈거다. 계속. 다 비었어도, 계속.

칼바람 속에서 코트깃을 여몄다. 뿌연 하늘에 허옇게 달이 빛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준혁의 등을 떠밀어 보내고, 혼자 비어가면서,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행복할 수 있을까.

조금 과장되고 허무맹랑한 생각이지만, 나는 그저 나같은 사람을 대표해서 한 번 더 살아졸 기회를 받은 건 아닐까. 불명(不明])의 존재. 미상(未詳)의 존재. 끝 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갈구하고, 또 갈구하는 그런 사랑의 무저갱(無底坑).

나는 가만히 서서 네가 걸어갔을 길을 바라보았다. 조금쯤 눈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쓰다. 안녕. 내 삶에 유일하게 특별한 사랑아. 내가 유일하게 갈구했던 사랑아. 내 나약과 비겁의 증거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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