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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을 보채는 법을 알고 있었다. 연고를 바른 직후의 상처처럼 시선을 끌어오는 법을. 이제는 삶을 견디기 싫어. 그렇게 말할 때면, 곰살궂은 손이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나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게 좋아서 나는 자꾸만 분별없이 행동했지.

그러니까 형, 내가 바란 건 저녁 찬거리를 메뉴에 따라 고를 수 있는 일이었다. 층층이 나뉜 진열대를 꼼꼼히 살펴보며 할인 스티커가 붙은 상품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동전 몇 푼과 지폐 한두 장쯤에 미련을 두지 않고, 고를 수 있는 재료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을 집어 드는 일.

그 날 저녁, 집 근처 시장에는 떨이가 나와 있었지. 도보 안쪽에 두꺼운 박스를 엎어놓고 그 위에 과일이 담긴 대야를 가지런히 진열해두었다. 알알이 굵은 방울토마토, 반쯤 무른 바나나, 고른 줄무늬가 그어진 참외, 그 중에서도 나는 작은 팩에 담긴 산딸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새콤한 것이 먹고 싶다던 형의 말을 떠올리며 내게 남은 돈을 헤아렸어.

이거 얼마예요?

……오천 원.

이틀 치 교통비를 떠올리며 주저하자 그는 냉큼 한 마디 거들었어. 저거, 원래 팔천 원이야. 나는 머뭇머뭇 지갑에서 천원 다섯 장을 꺼내 내밀었다. 아저씨는 지폐를 받아들어 허리 주머니에 넣었어. 그 무덤덤한 얼굴도 꼭 산딸기처럼 검붉었지.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뜰채를 꺼내들었다. 팩을 열어 쏟아 붓자 산딸기가 와르르 굴러 떨어졌어. 상한 것을 골라내기 위해 자세히 살펴보는데, 거의 모든 과육 틈새로 하얀 곰팡이가 먼지처럼 뭉쳐있었다. 성한 것을 그러모았지만 한 줌도 채 되지 않았어.

퇴근시간이 훨씬 넘어 돌아온 형은 눈가가 움푹 꺼져 있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앉은뱅이 탁자에 앉아 시험지를 한 뭉치 꺼내들었지. 나는 그 옆에 산딸기를 담아두었던 종이컵을 슬며시 올려놓았다. 형은 이게 웬 과일이냐며 싱겁게 웃었지.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리거나 죽죽 그어가면서, 열매를 하나 집어 입으로 가져갔어. 그러다 이내 눈이 가늘어지며 손끝으로 종이컵을 밀어놓았지. 채점을 끝내고서도 종이컵은 그대로 남아있었어. 잔업을 끝마치고 형이 이부자리를 편 사이, 탁자를 치우며 열매를 씹어보았지. 이빨로 으깬 산딸기는 시큼털털한 맛이 났어. 나는 혀끝을 씹으며, 싱크대 배수구에 모조리 부어버렸지.

그 날을 떠올리면 가슴 왼편이 선뜩하게 저려왔지. 그때 좀 더 질이 좋고 맛있는 과일을 사다주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잠시나마 내가 형을 원망했기 때문일까. 그깟 수고를 알아주지 않아 토라졌던 것. 상한 산딸기를 팔았던 주인아저씨를, 어수룩하게 굴었던 나를 미워했던 게 아니라. 그게 뭐라고 속이 상했었나. 형은 다음 날 바로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는데.

 

네가 찾아온 것은 장례식을 끝마친 다음 날이었지. 나는 옷장을 뒤적이며 형의 넥타이를 골라내고 있었다. 가짓수도 많지 않은, 비슷비슷한 격자무늬가 그려진 넥타이들 중에 형의 지문이 가장 많이 묻어있을 천을 가늠해 보았지. 그 중 하나를 화장실 문고리에 단단히 묶고 다른 한 쪽으로는 매듭을 지었어. 구멍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으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몸을 낮게 숙인 채 숨을 죽였지. 몇 초 뒤, 초인종이 한 번 더 울렸어. 고개를 들고 망설이는 사이 이번에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넥타이를 내려놓고 천천히 현관문 앞으로 걸어가 섰어. 방문자가 채근하듯 다시 초인종을 눌렀지.

누구세요.

손이나 겨우 비집고 내밀 수 있을 정도로 문을 열었어. 틈새로 보이는 얼굴은 낯이 익었지. 우목하게 패인 뺨과 콧잔등 위의 작은 점,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까지. 너는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몇 걸음 물러서며 문을 뒤로 젖혔지. 너는 고개를 까닥이더니, 곁눈질로 주위를 살피곤 살그머니 발을 들였다. 천장이 낮았기 때문에 키가 껑충했던 너는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어. 문을 닫자, 타인의 체취가 공기 중에 섞여 들어 잠깐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지. 너는 신발도 벗지 않고 방 안을 둘러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그 앞을 성큼성큼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지.

내가, 형……장례식에 못 가는 바람에.

너는 입술을 달싹이다 시선을 떨어뜨렸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이따금 가볍게 코를 훌쩍였어. 햇볕이 창틈으로 들어와 반쯤 벗겨진 벽지를 비췄다. 맨살을 드러낸 시멘트벽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지. 너는 눈가를 닦아내곤 신발을 벗었다. 바짓단이 스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어.

집이 왜 이렇게 어수선해.

타박하는 투였지만 어조는 조심스러웠지. 너는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하나둘씩 주워 반듯하게 개켰다. 옷에 붙어있던 먼지들이 노란 빛기둥 아래서 떠다녔어. 나는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부산스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지. 발바닥과 장판이 닿았다 떨어지는, 있는 힘껏 창문을 밀어 여는,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닦는. 일상적인 소음들이 귓가에 소란스레 내려앉았어. 나는 모로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다 썩었다.

너는 객쩍게 웃었어. 오른손에 들고 있던 건 싱크대 배수구 통이었지. 그 안에 담겨있던 건 닷새가 넘도록 짓무른 산딸기들이었다. 하루살이들이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었어. 나는 네게 다가가 배수구 통을 빼앗아 들었지. 그 안에 손을 넣고 움켜쥐자, 곯을 대로 곯은 열매들이 손 안에서 으스러졌어. 너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았지.

 

우리의 몸체 사이로 평화로운 침묵이 흘렀다. 발아래 으깨진 햇빛이 발바닥을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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