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칼이 들어있는 칼집과 같다. 칼은 뽑은 뒤의 행위보다 뽑게 된 경위에 무게가 실리는 것임에 침묵은 그때를 기다림이다. 날카로운 칼은 모두로부터 마땅히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들고 있는 이와 그를 마주하는 자 모두 상처 입히고 또 죽음에 이르게 하는 까닭이다.
어느 이는 말할지 모른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허나 그는 알아야 할 것이다. 최선이 언제나 현명한 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또 어느 이는 말할지 모른다. 때를 놓치면 언제 원수의 칼이 내 목전을 노릴지 모른다고. 허나 그는 알아야 할 것이다. 내 선택이 그에게 뜻밖인 까닭에 그 역시 어떠한 선택을 할지는 그때가 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얼마만큼 내가 욕보여야 그에게 입을 열어 대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욕보인다 생각하며 어찌 올바르게 침묵할 수 있는가."
침묵함은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봄을 의미한다. 생각의 깊이는 그 말에 대해 감정을 얼마나 배제하느냐에 달려있다.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에 침묵의 의미가 있다. 감정에 휘둘리는 칼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감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허나 감정이 이성을 방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침묵하노라.
침묵 속에서 결론을 내리는 동안 상대 역시 한결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그른 것은 없다. 현명함은 또 다른 현명함을 불러일으킨다. 보다 안정된 모습으로 사내는 사과의 손을 내밀었고 화해를 거절할 이유가 없음에 손을 맞잡았다. 그에 무엇이 문제 되겠는가.
감정이 내려앉은 눈을 지닌 이는 앞을 보지 못하는 이보다 어두운 시야를 지녔음을 인지하라. 앞을 볼 수 있음에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자에겐 수십의 가르침보다 확실히 그의 팔을 잡고 이끌어 주는 것이 옳음과 같다.
사랑하는 아들아. 잊지 말고 기억하라.
아비의 가르침은 자식의 행위로 증명되는 까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