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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작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 있었다. 나무의 밑동은 얇아서 한 팔로 안으면 안고도 품이 남을 것 같다. 어릴 적 내내 안고 다녀서 다 헤진 인형과 아마 비슷한 둘레일 거다.

어릴 적 내 첫 인형은 곰이라고 하기에는 귀가 길고 토끼라고 하기에는 귀가 짧은, 곰도 아니고 토끼도 아닌 그 중간의 모양새였다. 처음 인형을 품에 안았을 때 그건 꽤나 푹신했고 품에 들어오는 크기도 딱 좋았다. 꼭 나를 위해 만들어진 인형인 것만 같았다. 지금 인형은 천이 헤지다 못해 이곳저곳 터져서 배에는 몇 번이고 꿰맨 자국이 있다. 안으면 이제는 품이 남는다.

 

인형 배가 터졌을 때 그건 애초부터 솜이 꽉 찬 인형은 아니었으므로 솜이 막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터진 배 쪽을 벌려서 더 터지도록 한 것도 나였고 솜을 뽑아낸 것도 역시 나였다. 인형의 피가 희다는 사실에 놀라서 울면서 솜을 뽑아냈다. 솜이 남지 않아 홀쭉해질 때까지 전부 뽑아내고 인형은 그저 거죽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울지도 않았다. 솜을 한 움큼씩 집어서 다시 뱃속으로 넣었을 뿐이다.

 

나무줄기는 희었다. 그 희고 가느다란 나무줄기는 어느 부분 하나 곧은 곳이 없었다. 품에 안으면 조금 기운 모양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품에 안기 보다는 줄기에 등을 기대는 편이 나을 거다. 자세 자체는 편한 자세지만 나무줄기가 매끈한 건 아니라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흰 빛깔은 나무줄기를 꽤 매끈하게 보이도록 했다. 물론 인형의 속, 하얀 솜도 매끈하지는 않았다. 정말 피가 흰 색이었다면 그 피는 매끈했을지.

 

떠올려보면 인형을 등에 업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팔을 둥글게 말아 그 사이에 인형을 넣고 다녔다. 인형의 얼굴은 내 등을 향하도록 했는데 그럼 인형은 내 어깨에 얼굴을 걸치고 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 어깨에서 인형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 뒤에는 아무 것도 없었을까. 소리 없이, 무언가가 서 있었을까. 나는 어릴 적에도 지금도 뒤를 돌아본 적이 없다.

 

나무에 잎은 그렇게 많이 달려있지는 않았다. 가지는 나무줄기보다 앙상했고 많은 잎을 달고 있을 힘 같은 건 눈으로 보기에도 없어보였다. 내 키 바로 위쪽에 가지가 몇 개 달려있고 잎이 듬성듬성 자란 나무들처럼 나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그건 나무가 가진 몇 십 개의 눈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 나무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 내가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어져서 고개를 돌렸다.

 

인형의 눈동자. 내가 굳이 인형의 얼굴을 내 어깨에 걸쳐놓았던 건 인형의 그 눈과 눈이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다. 인형의 눈동자는 유리구슬 같았다. 던져도 깨지지 않을 테니까 유리는 아니었겠지만 플라스틱이나 다른 재질이라고 하기에는 유난히 투명했다. 눈이 마주치면 그 안에서 내가 보일 정도였다. 눈동자에서 내 얼굴이, 내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두려워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고 내가 인형의 눈을 피했던 건 아니다. 나를 비추는 건 어차피 여기저기에 있었다. 거울도 그랬고, 어떤 때는 창문도 그랬다. 나는 종종 누구도 없는 데에서 시선을 느낄 때면 인형의 눈동자를 떠올리곤 했다.

 

나뭇잎에서 고개를 돌려 다시 나무 밑동으로 눈길을 옮겼다. 쭈그리고 앉아 몇 번이고 나무 밑동에 칼을 그었다. 몇 나무들은 이렇게 그어봐서 껍질이 잘 벗겨지느냐 안 벗겨지느냐로 나무를 구분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나무의 이름을 알고자 하는 목적은 아니었지만 나는 몇 번을 더 그었다. 어떤 의미 있는 것을 새기지는 않았다. 그런 건 부질없었다. 내 인형에도, 배를 꿰맸던 그 실로 내 이름을 새겼던 적이 있다. 그건 결국 내 이름을 인형에게 내가 줘 버렸던 것이 아닐까. 나는 그 후로는 이름이 없다. 나는 나무의 이름을 알고 싶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새기고 싶지 않았고 그냥 긋고만 싶었다. 정말로 긋고 싶었던 게 이 껍질뿐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귓가에서 노랫소리를 들었다. 소리는 망가진 발음과도 닮아서 뜻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럴 때면 이불을 둘러쓰고 인형을 품에 안았다. 인형의 눈은 이불을 향했다. 소리는 잦아들지 않고 인형의 입이, 실로 꿰매어 만들어진 그 입이 내 귀에 닿는 순간이면 노래를 부르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그 인형이었다. 이불이 내 위를 전부 덮고 있어서 나는 인형을 던져버릴 수도 없었다. 있는 대로 손을 휘둘렀고 다시 인형의 배를 찢었다. 마지막에 내 손이 잡은 것은 내가 한 번도 제대로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어떻게 그것이 내 손에 잡힐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그은 부분 쪽에서 나무껍질을 몇 개 떼어내서 입에 넣고 씹었다. 맛있지는 않았다. 씹으니 원래 그런 건지 나무 향이 입 안 가득 올랐다. 그마저도 맛있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씹다가 그냥 뱉었다. 오래 씹을만한 건 못 됐다. 내 이나 혀나 나무색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잠깐 불안해졌지만 나무는 흰 색이고 상관없을 것이다.

 

침대 옆 탁상에는 밤이면 늘 양초에 불이 붙어 있었다. 내가 끄지는 않았으므로 불은 계속 탔을 텐데 아침에 일어나면 불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꺼져 있곤 했다. 내 잠버릇이 양초를 넘어트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것에 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잘 때 방이 완전히 어둡지 않다는 건 그 시기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 양초에 내 손에 잡혔던 것이다. 나는 인형에 불을 붙였다.

 

나무는 자작자작 거리며 불에 잘 탔다. 일단은 줄기를 조금 떼서 불을 붙여보았는데 잘 붙기에 아예 나무에 불을 놓았다. 나는 나와 나무 사이에 거리를 두었다. 나무의 몇 십 개의 눈들이 불을 타고 춤을 췄다. 몇 번을 눈들과 눈이 마주쳤다. 불은 위를 향했고 내 시선은 이번에는 그것을 그대로 따라갔다. 나무가 전부 탈 때까지 불이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나도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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