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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의 시선은 냉기가 되어 떨어진다.

 

 흑, 그리고 백. 끊임없는 무채색의 향연이 그가 속한 세계의 전부였다. 타오르는 심장의 빨강도 찢어지는 눈물의 파랑도 그에게는 모두 명도가 다를 뿐인 하나의 색이었다. 허나 그를 일컫는 말의 머리에는 무가 붙어있으니 색이라 말하는 것부터가 모순이겠다. 그럼에도 것의 끝에는 결국 채색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彩色. 남자의 머리털부터 신체의 말단까지가 존재하지 않는 색으로 덮여있는 꼴이었다. 존재하지 않으니 죽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남자는 온갖 죽은 빛의 중심에 서있었다. 그 중 흑은 머리통과 눈알에, 백은 뼈를 감싸고 있는 가죽에 가 박혔다. 생물체를 흉내 낸 완벽한 무생물인 것이다. 남자는 무생물로서 죽은 숨을 이어갔다. 몰아쉬는 호흡에서는 썩어 들어가는 악취가 배어나올 것 같았다. 하여 남자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반듯한 횡을 그리고 제게 떨어지는 멸시를 받쳤다. 곧은 선이 튕겨내는 것들은 무시했다. 그것까지 주워 삼키기엔 남자가 가진 직선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 이유였다. 둥글게 말려있었어야 했을 눈알마저도 늘 천장에 치받혀 반절쯤은 직선을 띠었다. 눈모도 알을 따라 하늘로 치솟았다. 것에 달린 털들은 햇빛 아래 적적한 차양을 만들었다. 그마저도 직선이었다.

 

 날이 선 육신에는 서리서리 방자함이 스며있었다. 불퉁한 입술과 꺼진 뺨에는 방자를 넘은 오만이 있었다. 결핍된 육신이란 그러한 것이었다. 남자는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저버리고 스스로 다른 무엇이 되길 택했다. 그렇게 절대자가 되었다. 메마른 입술은 사막이었고 그 안에 담긴 살덩이는 모래뱀의 현신이었다. 내뻗는 손과 발에는 서리가 몰아친다. 남자의 존재는 하나의 거목이었다. 비썩 말라 생명조차 멈추었지만 그의 조각난 영혼은 증이 되어 얼굴을 덧칠했다. 가증, 애증, 증오, 증원, 증척, … 남자의 단어에는 憎이 빠지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로부터 시작한다. 우둘투둘 뼈대가 드러난 몸뚱이는 가증을 뜻했다. 상대를 내려 보는 눈에는 애증이 따랐고 들썩이는 입술에는 증오가 가득했다. 하얗게 질린 마디는 당신을 증원한다는 것을, 태깔이라도 부리는 듯한 콧대는 증척을 말했다. 절대자로서 남자가 가진 것은 자애와 긍휼이 아닌 잔인함과 분노였다. 택한바 그것뿐이었으니 남자는 차츰 제 감정에 말라갔다. 웃음이 가시고 냉정이 자리한다. 감정은 넘칠수록 사람의 피를 말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남들과 다른 길을 택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과 괴리되고 무생물에, 절대자에 가까워진다. 진실로 이상한 일이다. 남자에게 있어 이상이란 이상(異常)이 아닌 이상(理想)이었다.

 

 기적 소리가 잦아들 때마다 안주하게 되던 죄악과의 재회. 흑백의 세상에는 신(新)이 없다. 회색의 불꽃이 허연 담뱃대를 타고 올라 검은 재를 떨어뜨린다. 투박하게 조각된 거목의 손에서는 항상 나무의 향이 아닌 담배향이 났다. 음울함을 베어 문 입술의 말미가 옴폭 패여 골을 만든다.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성경의 물음에 남자는 불꽃을 지진다. 남자에게는 허물이 없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허물없는 몸이었으니 그는 곧 허물투성이의 몸이었다. 너덜너덜한 죄악의 껍질 아래에서 제 속살을 밀어 올린다. 쭉정이였다. 내실 없는 몸통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었다. 담지 않기도 했다. 공립할 수 없는 가치들이 서로를 마주한 채 나란히 서있었다. 이 저돌적인 양립이 남들의 눈에 보이진 않을 게다. 그를 감싸고 있는 수많은 이상(理想)이 곧 허물이자 모순이 되었으니. 이것이 그가 가진 유일한 이상(異常)이다. 종래에는 결국 얇은 피막 아래 착종된 오만(五萬)의 쓰레기가 된 것이다. 모든 것은 오만(傲慢)의 응축이 빚은 작품이었다. 남자는 웃음을 삼킨다. 오래토록 비치지 않은 파열음은 남자의 몸통이 담은 쓰레기 중 하나였다. 소태란 오로지 문드러진 몰골을 견딜 수 없을 때만 폭발했다. 참고 눌렸던 감정의 분출은 비리고 쓰기만 하다. 산이 무너져 흙을 뒤집어 쓴 것만 같았다. 폐부로 모래뱀이 미끄러져 들어가 숨통을 막는다. 눈꺼풀 위로 떨어진 서리는 눈을 멀게 할 것이다. 넘치는 감정은 피를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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