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것은 너를 향한 미련일지 모른다. 너와의 기억 속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진 미련은 쌓이고 쌓여서 호수가 되고 강이 되었다. 너에게 잠긴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너는 나의 우주였다. 하얗게 얼어붙은 세상 속에서 너는 나의 유일한 태양이 되었다. 나의 세상은 너를 중심으로 돌았다. 내 모든 것을 희생해도 나는 좋았다. 오로지 너로 인하여 나는 웃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시간이었다.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고 남몰래 소원을 빌 만큼.
그러나 행복의 순간은 짧았다. 황홀한 행복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너는 사라졌고 나의 우주는 무너졌다. 내 세계는 이내 종말을 고했다. 네가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기에.
네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나는 부정했다. 나는 그저 지독한 악몽 속에 빠진 것뿐이야. 꿈에서 깨어나면 다시 네가 웃어줄 거라고, 그렇게 믿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느껴지는 지독한 현실감이 나를 짓눌렀다. 아무리 외면해 보아도 그것은 너무도 분명하게 현실이었다.
부정의 단계가 끝나자 찾아온 것은 막연한 분노였다. 소리치고 난동을 부리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 분노의 와중에도 차마 너에게는 화를 낼 수가 없더라.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쉬지 않고 분노를 내뿜었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공허한 외침이었다. 대상을 잃은 분노는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힘없이 스러질 뿐이었다.
분노가 사그라질 즈음엔 신에게 매달렸다. 밤낮으로 무릎을 꿇고 빌었다. 대가가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너를 돌려달라고. 눈을 뜨면 네가 보이게 해달라고 빌며 잠에 들었다가 깨어나 실망하기의 반복이었다. 신에게 매달렸다고 했지만, 너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 대상이 악마여도 상관없었다. 그만큼 나는 절실했다.
한참을 빌고 빌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깊이를 모르는 우울이 나를 잠식했다. 무기력함과 공허에 휩싸여 그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다.
그날도 소파에 반쯤 누워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응시했다는 표현은 옳지 못했다. 시선은 창밖을 향했지만 나는 밖을 보고 있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 허상뿐인 너를 그리고 있었겠지. 그때였다. 눈이 내렸다.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이기 시작했다. 너와 처음 만나던 날에도 눈이 왔었지. 모든 것은 결국 너로 이어졌다. 나는 너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미 모든 것을 너에게 내어준 나는 빈껍데기일 뿐이었다.
무엇에 홀린 듯 천천히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손등에 와닿는 눈송이의 감촉이 시릴만큼 차가웠다.
눈송이가, 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