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紅(붉을 홍)]-하윤시우
손이 망가졌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는 더 이상 붓을 쥘 수 없음을 남자가 깨달은 지 한달 남짓 되었을까, 그의 애인이 그에게서 떠나갔다. 손이 망가지기 전처럼 손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남자를 보기가 너무 힘들다는 이유였지만, 불과 3일 뒤에 남자는 사람 많은 밤거리에서 다른 남자와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오랜만에 본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알아보지 못하는 듯 술기운이 흥건한 시선을 돌렸다.
그에 반해 남자의 시선은 그녀에게 오랫동안 꽂혀 머물렀다. 남들은 알 수 없는 눈빛을 하고서는 여자를 쳐다보는 남자를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가 유심히 보았다면 미친놈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여자가 남자의 눈을 깨달았던 것은 만취했던 술이 어느 정도 깨고 나서였다. 소름끼치는 시선, 검은 눈동자에 피곤이 짙게 내려앉은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옆에 있던 애인에게 야살스러운 몸짓으로 밀착하며 귀엣말을 했다.
오빠, 오빠아-. 내 앞에 있는 거지같은 새끼가 자꾸 나 쳐다봐. 응? 남자의 팔을 안고는 애완 고양이처럼 애교를 피우는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너 뭐야, 이 새끼야! 이윽고 테이블이 넘어지는 소리와 유리잔이 깨지는 날카로운 파열음. 깨진 파편에 손을 베였는지, 왼손이 뜨겁게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남자는 오른손을 몸 뒤로 감추고 주춤주춤 궁둥이를 뒤로 물렸다.
이제는 쓰지 못하는 오른손을 반사적으로 숨기고 찢어져 피가 흐르는 왼손을 방패막이로 삼았다. 그러나 그것이 만능은 아니라서, 남자는 곧 만신창이가 되어 길바닥에 내던져 질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맞은 온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술집의 문이 매섭게 닫힐 동안 멀리 있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 했다.여자의 눈은 경멸의 빛을 띄고 있었고, 남자는 잊혀진 존재였다.
이내 남자는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 망설임 없이 일어서 다리를 절뚝이면서 비가 내려 질척이는 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남자가 집에 도착했던 때는 벌써 어슴푸레하게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이었다. 남자는 현관에 신을 벗어두고 거의 기어가듯이 계단을 올라 자신의 작업실로 향했다. 어느 새 거칠어진 숨을 고르면서도 남자는 엉거주춤 방바닥에 앉아 항상 준비해두는 하얀 캔버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후,달달 떨리는 오른손에 몇 번이고 번갈아 시선을 주고 난 다음에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 벌떡 일어나 한쪽에 박혀있던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무엇인가를 왼손에 쥐고 붓을 쥔 오른손에 감아내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붕대였다. 그렇게 붕대 하나를 다 쓴 후에야 그의 오른손이 온전히 붓을 쥘 수 있게 되자, 그의 눈동자에 비로소 빛이 찾아들었다. 스케치를 할 시간은 없었다.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아크릴 물감을 묻힌 붓을 하얀 캔버스 위에 그려내는 것은 그에겐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렇게 남자의 머릿속에서 튀어나와 캔버스 속을 빨갛게 물들인 여자는 마치 살아있는 불꽃같았다. 술집에서 그녀가 입었던 붉은 원피스, 경멸하는 눈빛, 평소 그의 앞에서 바르지 않았던 짙은 색의 입술까지도.
그는 그림이 완성되고 난 뒤, 그의 오른손이 더는 움직일 수 없음을 깨달았고, 그림이 완성된 그제서야 그녀를 안아들고 길을 나설 결심을 했다.
망설이는 기색 하나 없이 검은 천으로 캔버스를 감싸 꽁꽁 묶어낸 남자가 그림을 안아들고 정든 집을 떠나고, 집 앞에는 그가 집을 나서면서 남겨진 빨간 발자국만이 점점이 찍혀, 이제는 아무도 없는 빈집에 누군가가 존재했었음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