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랑 나는 좋은 친구다. 언제부터 그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렇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달라진 게 별로 없다. A는 어린아이만큼 무지해 자기 눈 앞에 죽어가는 동물을 보아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 할 것이며, 나는 상처입고 비틀거리다 결국에는 고개를 돌려버리는, 피흘리는 동물이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이다.
A는 내가 그에게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모른다. 아마. 그래서 햇살이 머리를 데우며 학교를 가던 날이나, 더 어렸을 적 도시락을 싸들고 근처 공원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던 때, 아무렇지도 않은 말로 날 상처줬겠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면 입에서 풍기는 단내가 내 살갗에 닿곤 했다. 왜, 지난번에 남자애 있잖아. 나한테 토요일날 같이 영화 보러 가자는 거야. 혹은, 너는 커서 누구랑 결혼할 거야? 네가 말했던 똑똑하고 상냥한 사람? 나는 그 사람이 남자라고 말한 적도 없었고 그 사람이 A라고 밝힌 적은 더욱이나 없었기에 침묵을 지켰고 내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기적이여서 혼자 말의 뜻을 분해하고 혼자 상처입었다. 나는 예쁘게 생긴 공주님 같은 아이도 아니였고 이렇다 할정도로 재치있거나 성격이 좋지도 않았기에 그럴 때면 못난 아이가 되었다. 그럼 A는 그걸 또 금세 알고 팔을 내밀어 안아 주었다. 가장 충실한 하인은 또 그것에 기뻐한다. 일방통행인 듯 하면서 일방통행이 아닌 관계.
따지고 보면, 우리가 친구라는 이름으로 계속 붙어 있었던 것은 기적이다.
넌 왜 자꾸 우니. 한번은 A가 나에게 물어봤었다. 언제나처럼 청소 시간까지 나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고 교실에는 우리 둘과 햇살에 반사되어 허공을 배회하는 먼지 뿐이였다. A는 사물함 위에 앉아 다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꿀색과 갈색으로 물든 늦여름의 피부, 예쁘게 곡선을 그리는 다리. 얇은 허리. 정말, 아무런 걱정도 담지 않은, 항상 변하지 않는 그 미소. 리본이 달린 여름 하복. 세라복. 어깨까지 떨어지고 햇살에 반사되어 윤기가 나던 머리. 찰나의 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억은 진하다. 넌 왜 자꾸 우니. 그건 따지는 투가 아닌, 어머니가 제 자식을 돌보는 듯한 어르는 투였기 때문에 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나의 서러움, 나의 한은 좀 더 근본적인 것에 있었고, 왜 A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코끝이 시큰거리는지, 왜 A가 친구들과 피구를 하면 난 A의 긴 손가락만 바라보다가 맞고 아웃되는지와 더 연관되어 있었다. 겁쟁이, 소심한 그 애가 자기 단짝친구를 좋아한대! 자기 단짝친구를 색시로 데려와서 평생 같이 살고 싶대! 자기 단짝친구를 사랑한대! 나는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도 돌리고 왼쪽으로도 돌려봤지만 나갈 길이 없었다. 우린 친구잖아, 가끔 가다 넌 날 불편해하는 거 같아. A가 조용히 말했다. 왜 그런지 말해줄 수 없어?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같은 하복을 입어도 너에게는 어울렸지만 나에게는 초라했다. 그날 역시 나는 같이 있기에 아까운 여자아이였다. 난 쓰레기야. 내가 말했다. 아니야, 넌 내… A가 말을 하다 멈추었다. A도 울 것 같은 표정이였다.
내가 왜 자꾸 울었는지, 그 얘기를 한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A는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나는 많은 말을 했다. 아마 A랑 지내면서 했던 말들 중 그때가 가장 말을 길게 했을 것이다. 그녀가 팔을 벌렸다. 나는 거기에 안겼다. 바보같기는, 난 널 싫어하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나는 이번에도 울지 않았다. 내 목구멍에 커다랗고 축축한 무언가가 꽉 달라붙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A와 나는 좋은 친구다. 나는 A를 사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