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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UPON A TIME

 

 

 

 

 

 

먼 옛날, 오랜 옛날.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왕자들이 있었다.

형인 첫 번째 왕자는 냉정하고 차가운 인상을 가졌지만 사실 겁이 많고 한없이 다정한 소년이었으며, 동생은 왕비를 닮아 아름다운 얼굴에 아주 애교가 넘치고 대범한 아이였다.

형제는 터울이 제법 났으나 동생을 헌신적으로 돌봤고 동생은 부모보다 형을 더 사랑하고 잘 따랐다. 평생 갈 것만 같았던 형제의 우애는 무척 참담한 형태로 막을 내렸다.

 

왕세자인 형, 에드윈은 이웃나라 공주와 국혼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웃나라 공주 또한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고, 누구나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숙녀였다. 그들은 곧 있으면 두 나라의 백성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에드윈은 물론 동생인 헨리도 함께 축복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정작 헨리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해줄 마음이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그는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반역을 일으켜, 국왕인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또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신하들을 모조리 숙청하는 잔악함을 보였다. 그런 다음 이번 일의 모든 죄를 형인 에드윈에게 덮어씌우고 탑에 유폐시켰다.

나라가 발칵 뒤집힌 이 사건은 ‘미쳐버린 에드윈 왕세자가 국왕을 살해해 왕위를 찬탈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국왕의 측근들이 죽었으며 이를 저지하다 벌어진 항쟁으로 헨리 왕자가 왕세자의 측근들을 사살했다.’ 그것이 세상에 알려진 사건의 전말이었다.

 

 

 

 

* * *

 

 

 

 

“―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처음엔 이 반란에 귀족들이 헨리를 끌어들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헨리가 영악하다 한들 어린 아이가 이런 엄청난 짓을 했으리라고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어리고 천사같은 자신의 동생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무시무시한 악마가 있었다는 것을 훗날 깨닫게 되었다.

식사를 배급해주는 궁녀를 회유해 탈출을 시도한 적이 있다. 얼마 가지 않아 붙잡혔고, 궁녀는 에드윈을 탈출시키려 한 죄로 고문당하고, 처형되었다.

에드윈이 보는 눈앞에서, 헨리가 직접 그녀의 눈을 도려내고 혀를 잘랐으며 귀도 잘랐다. 얼마나 애원했던가, 그녀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죄 밖에 없으니 죽이려면 자신을 죽이라고. 더 이상 고통을 주지 말라고 얼마나 빌었던가. 그러나 헨리는 아랑곳 않고 그 작은 손으로 검을 잡아 궁녀의 심장을 찌르고 마지막으로 목을 내리쳤다.

넋이 나간 에드윈의 아킬레스건을 잘라 도망칠 수 없게 두 다리를 빼앗았으며 행여 창문으로 뛰어내리지 못하게 모든 탑의 창문을 단단히 막았다.

아버지를 잃었다. 세상과 단절되고 두 다리와 빛도 빼앗겼다.

‘어려서일 거다’라는 말로는 더 이상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헨리는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헨리는 이제 없어. 죽었어.”

 

빛이 사라진 탑 안에서 어둠이 마음을 좀 먹고,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절망감은 한없이 차갑게 얼어붙은 증오로 바뀌었다.

 

 

 

 

* * *

 

 

 

 

“오늘은 형이 가장 좋아하는 홍차를 가져왔어.”

 

헨리가 찾아왔다. 발그레한 뺨을 수줍게 붉히며 손수 테이블을 세팅했다. 깨끗한 식탁보를 깔고, 그 위에 가져온 촛대를 올리고 불을 옮겨 붙였다. 세 개의 초에 불이 붙자 방이 훤해졌다. 그 바람에 에드윈은 눈이 부신지 눈살을 찌푸리며 촛불에서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과 벽. 곳곳에 거미줄이 있었다. 허름한 침대에는 좀 먹은 이불이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었다. 여기저기 바닥에는 온갖 물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또 잔뜩 어질러놨네?”

 

헨리는 방을 둘러보더니 생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다. 헨리가 탑의 모든 창문을 막아버려 낮에는 햇빛도, 밤에는 달빛도 들어오지 않아 어둠 속을 헤매고 다녀야했다. 뿐만 아니라, 다리를 쓰지 못해 휠체어에 의지해야하니 여기저기 부딪히는 건 예삿일이다.

 

“청소는 티타임이 끝나면 해줄게.”

 

헨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달콤한 냄새가 나는 케이크와 비스킷을 테이블 위에 옮기고, 에드윈의 휠체어를 식탁 가까이 끌어다주는 배려심까지 보였다. 그리곤 본인도 에드윈의 마주 편에 앉아 홍차를 찻잔에 따랐다.

 

“형, 나도 요즘 이 홍차를 자주 마시고 있어. 여기에 없어도 이 차를 마실 때면 형 생각이 나서 말이야. 왠지 이 차향이 형의 냄새같이 느껴져서 나도 이 차가 좋아졌어.”

 

헨리는 묻지도 않았는데 재잘재잘 멋대로 잘 떠들어댔다. 빛이 눈에 조금 적응이 되자 눈을 뜬 에드윈은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퀭하니 헨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그리고 있잖아, 성 바깥은 축제 준비로 한창이야. 올해 축제도 형하고 함께 가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슬프네.”

 

에드윈은 저 얼굴에 대고 토악질을 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순진한 어린 아이의 얼굴을 하고 그 뒤로는 끔찍하게 뒤틀린 사악한 내면이 들여다보여 숨이 막혀 질식 할 것 같았다.

 

“형이 건강해지면 다음 해에는 함께 가자.”

 

그런 날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피차 서로 잘 알고 있는 바임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매번 늘 자신의 희망을 에드윈에게 바라곤 한다. 어쩌면 헨리는 진심으로 그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에드윈은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결단코 이 악마가 원하는 대로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한때 아낌없이 사랑했던 동생 헨리를 향한 감정은 이젠 증오밖에 남지 않았다.

 

“기억나? 재작년에 얼음 축제 때 말이야. 형이랑 성 밖에 같이 나갔었잖아?”

 

헨리는 지난날의 추억에 빠진 듯 들뜬 마음에 재잘댔다. 천사가 노래하듯 달콤한 미성으로 사랑스럽게 웃으며 속삭였지만 에드윈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사악한 악마의 속삭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때 내가 사탕 먹고 싶다고 조르다가―”

“난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에드윈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늘 그랬듯 첫 마디부터가 그를 향한 저주였다.

 

“너의 그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 뒤로 사악한 악마가 있다는 걸 백성들이 알면 어떤 얼굴을 할까? 백성들은 내가 미쳐서 아버지를 죽인 줄로만 알고 있지. 네가 그렇게 말을 흘려 놓았으니까. 네가 아버지를 죽이고, 내 다리를 망가트리고 이곳에 유폐시켰다고 누가 상상이라도 할까? 고작 내 국혼을 막기 위해서!”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에드윈은 험악하게 말했다. 그러자 헨리는 상처받은 얼굴로 서글픈 듯 눈 꼬리를 내리며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말했잖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랑 함께 있는 게 싫어. 난 형 없으면 한 시도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잖아.”

“그냥 죽어버리지 그래.”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마.”

 

헨리는 손을 내밀어 에드윈의 뺨을 만졌다. 에드윈은 그 손을 뿌리쳤다.

 

“정말 빨리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아니면 날 죽여. 이런 식으로 나에게 더 이상 모욕을 주지마.”

 

헨리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난 형을 죽이지 않아. 평생 형하고 함께 할 거야. 형이 약속했잖아. 우리 형제는 죽을 때까지 함께라고. 모든 걸 함께 할 거라고.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에드윈은 분노에 치를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갈라진 입술에 금방 핏방울이 맺혔다.

 

“난 형을 사랑해. 가족인 나만이 형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거야. 내가 형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진실된 사랑이야. 형은 평생 여기서 내 사랑을 받으면 돼.”

 

달콤하게 속삭이는 그 저주의 말이 소름 돋는다. 그의 미소가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수렁 속으로 자신을 떠밀어 넣는 것 같았다. 헨리가 자신이 여기서 썩어 죽을 때까지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것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를 죽여야만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헨리가 몸을 내밀어 에드윈의 이마에 입 맞췄다. 그가 가까운 지금이 기회였다.

 

“사랑해, 형.”

 

하지만, 동생의 얼굴을 한 이 악마를 도무지 죽일 수가 없어 더욱 절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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