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깊은 아득한 심연 한 가운데에, 언제부터인가 밝고 새하얀 순백이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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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먼저 서로를 찾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둘 중 누군가는 외로움에 사무쳐 미쳐가고 있었으리란 것. 그리고 그 외로움과 고독을 견디다 못해 목이 터져라 오열하며 애원했으리란 것. 제발, 누구든 좋으니 만나게 해줘. 혼자는 싫어. 제발, 제발.
그 애탄 소원을 마침 지나가던 신이 들어준 것인지, 미묘하게 부서진 법칙 아래 심연과 순백은 모순되는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결이 닿을 정도의 장소에서 공존하게 되었다. 세계의 양 끝 벼랑에 걸터앉아 먼 지상을 바라보기만 하던 과거와는 다른. 명백하게, 둘.
심연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수줍은 소녀처럼 볼에 홍조를 띄우던 순백은 이내 그 손을 마주잡았다.
맞물려 돌아가던 톱니바퀴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있어 ‘시간’이라는 것은 그저 추상적인 흐름의 명칭일 뿐이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심연 탓에 순백은 사방이 온통 어두워 낮인지 밤인지를 구분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고, 심연은 순백에게 굳이 시간을 알려주려 하지 않았으며 자신 또한 시간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순백은 오롯한 자유를 얻었다. 심연 속을 거닐면서 어둠을 세어보는 일. 순백이 즐기는 일은 이게 전부였다. 더불어 새하얀 손가락이 저를 이루는 어둠을 하나하나 짚어 세어갈 때가 유일하게 심연이 저 밖 너머 세계의 일들을 외면하고 마음 편히 긴장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이후 칭찬하듯 뼈만 앙상히 남은 해골 손으로 무채색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것은 심연의 낙이자 영생의 주축이라 볼 수 있었다.
말간 얼굴이 제 쪽을 뒤돌아보며 티 없이 웃어보였다. 화답이라도 하는 것 마냥 그 미소를 마주한 흑색 왕좌를 차지한 존재도 엷은 호선을 그려냈다.
제 앞 찬란한 순백은 이대로만 있어주오. 부디 세계를 짊어지지 않기를.
또 한 번의 외면에 빗발치는 야유가 심연의 망토 끝자락을 찢어발겼다.
하루, 이틀, 닷새, 보름. 순백이 채 느끼지도 못 한 의미 없는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그 동안 비난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겨진 망토를 휘감아 두른 심연은 끝내 제 한쪽 다리마저 내주었다. 그러나 멀쩡했던 다리 대신 차갑게 빛나는 의족을 착용했음에도 심연은 계속해서 시선을 돌렸다. 마음먹은 이상 번복은 없다. 제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세계가 아니라 순백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왼쪽 눈의 시력을 잃어버린, 고귀한 모순의 존재. 심연이 품에 안은 순백의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제아무리 세계가 요동치고 온몸을 찢어낸다 한들 손끝 하나 댈 수 없을 짐의 신이여. 책임은 짐이 지고 있어, 그러니- ……더는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아도 돼.
심연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가녀린 유리 세공품을 다루는 것처럼 순백의 쇄골 깊숙이 애달픈 입맞춤을 새겨 넣고,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어 자장가를 불렀다.
입맞춤이 새겨진 순백의 쇄골에서 검은 해골이 피어났다. 하나, 둘. 하나, 둘. 그 사실을 알지 못 하는 순백은 정적 속에서 들리는 희미한 자장가 소리에 하염없이 잠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오직, 심연만이 해골의 자취를 알아채고 짙게 미소 지었다.
순백이 목소리를 잃었다.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심연이 눈가를 찌푸렸다. 세계의 외침은 자신이 막고 있다. 비록 그것이 찢어진 망토와 의족으로 대신 된 한쪽 다리일지라도. 이제 내어주고 있는 것은 다리에 이은 사지 중 하나, 한쪽 팔이었다. 물론 뼈로 이루어진 나약한 해골의 팔이지만, 그런 쓸모없는 정보는 잠시 제쳐두고. 그런데, 왜. 고이 품고 있던 순백이 상처를 입어가는 것인지.
감출 수 없는 초조함이 심연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톡톡, 제 무릎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모양새가 순백의 눈동자에 아스라이 비쳤다. 순백이 손짓으로 심연을 부르려다가, 다시 손을 거두었다. 지금 심연을 건드리면 왠지 저 끝없는 어둠의 일부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 어둠에게 먹히고 살이 찢어져, 마침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존재를 부정당할 것이라는 확신 어린 느낌이 순백의 온몸을 감싸고 휘감았다. 그저 조용히 뒤로 물러난 찬란함에 심연의 주변이 한층 더 빛을 잃었다. 그 순간 순백의 쇄골 구석에서 잠자던 검은 해골이 약간, 크기를 키워 활동범위를 넓혔다.
고뇌의 시간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이 없어. 심연이 짓씹듯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내어줄 만한 건 거의 전부 내어준 상태였다. 그러나 외침은 약해지기는커녕 점차 거세어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순백에게도 종종 모습을 보였다. 고열의 외침에 상처 입은 순백의 팔에는 심연을 닮은 검은 붕대가 둘러져 있었다. 다치지 않기를 그리 기도했건만 결국 여린 아이가 거친 언사를 이기지 못 하고 기어코 몸에 흠집을 냈다. 자학의 일종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벌이는 어린아이의 몹쓸 치기.
하지만 뭐가 됐건, 세계는 끝에 다다랐다. 이 이후는 종말과 파멸과 붕괴의 나락. 그것을 일으켜 세울 용의는 단언하건대 어둠 한 조각만큼도 없다. 사악하다 여겨도 좋고, 이기적이라 욕해도 변명하지 않을 것이다. 제게는 나의 소중한 존재가 무사하다는 결과만 얻는다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으니.
무너져라, 세계. 그 무너짐에 짐이 기여하리라.
심연의 한 마디가 세계를 울린 그날, 순백의 머리카락 끝은 심연으로 물들었다.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심연이 뼈마디 두드러진 해골 손을 내밀자 더 이상 순백이라 부를 수 없는 타락이 피 흘리는 제 손을 들어 감히 심연과 이어지고자 했다.
곧 세계는 완전하게 무너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