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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밤길을 걷는 것을 본다.

네게서는 달의 냄새가 난다.

너는 걷고, 걷고, 걷는다.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바람에 이는 나무가 귀신울음을 흘려댔다. 남자는 밤길을 걷고 걸었다. 오늘도 한 발 내밀 때마다 축축한 흙바닥을 비질하는 삼신은 지난번 장터 때 먼 길 발병나지 않게 단단히 신고가라 마누라가 유난을 떨며 욱여넣은 것이 발에 퍽 맞아 자주 신고 있는 것이었다. 밤길이 쌀쌀해 옷깃을 여미고 등짐을 다시 맸다. 텅 빈 등짐 속에는 덜렁 싸여있는 고기 한 덩이가 전부였다.

 

사실 이번 장터는 출발도 전부터 도적들에게 다 털렸다는 흉흉한 소문이 아낙들은 모르게 술잔을 타고 전해져왔었다. 사실 말이 좋아 도적이지, 사람의 사지를 잘라가는 미치광이 살인마라는 소문이 더 신빙성 있게 주막에서 주막으로 퍼졌다. 청에서 소금을 잔뜩 들여왔다는 이야기에 워낙 기대가 많았던 장인지라 의견이 분분했다. 대다수의 장사꾼들은 그래도 이대로 쪽박 찰 순 없으니 허허벌판만 보고 오더라도 산을 넘어가고야 말겠다 으름장을 놓았고 시간 아깝고 목숨 아까운 몇은 마을에 남겠다 했다. 남자는 후자였다.

 

뒤에서 잘 다녀오시라 손을 흔들어주는 마누라에게 영 미안했으나 꼭 그곳으로 넘어가면 당장이라도 험악한 얼굴의 도적떼가 나타나 쥐도새도 모르게 몸뚱이를 죄다 난도질 해갈 것만 같아 괜히 등짐만 맨 채로 마을에서 떨어진 산길만 맴돌았다. 동료 상인들은 제 말을 비웃고 겁 많던 김씨가 드디어 정신이 회까닥 했다며 껄껄댔다. 겁이 많은 제게 사람 머리통을 삶아먹으면 그렇게 정신에도 좋고 맛도 좋고 특히 육질이 가히 최상이니 보양식으로 먹고 정신 좀 차리라 부러 겁을 주며 농지거리를 해대기도 했다. 제 말을 무시한 그들은 필시 험한 일을 당하고도 남을 터였다. 남자는 강렬한 예감과 상상에 떨었다. 손해를 잔뜩 보면서도 장에 나가지 않은 것은 미안했지만 제 목숨을 위한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지난번 장에서 몇 번이나 약속한 꽃자수 반달빗을 사오는 것을 정말 젊은 나이에 정신이 회까닥 하는지 그만 까맣게 잊어버리고 돌아와 잔뜩 토라진 마누라에게 이번 장에서는 네가 가장 좋아하는 맛있는 고기 한 덩어리를 사오마 했던 약속 때문이었다. 아내는 이번에도 잔뜩 기대를 하고 있을 터였다. 저를 무슨 몸종쯤으로 아는지 짜증도 영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어린나이에 시집든 아내에게 해준다면 가장 좋은 것으로 하고 싶었다.

 

남자는 마을에서 떠나기 전 미리 몰래 고기를 샀다. 처음엔 마을의 푸줏간을 모두 들려 돈을 척 내밀며 가장 맛 좋고 육질 좋은 고기를 내보이라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이놈의 백정들이 제가 양반이 아니라고 무시를 해대는지 영 질 떨어지는 고기만을 내어오는 것이었다. 난장판을 만들며 패악질을 부려도 자기 푸줏간에 있는 가장 좋은 고기는 이게 전부라 굽신대기만 했다. 그래도 이어지는 남자의 한참을 망설이던 백정이 몰래 귀띔을 해주었다. 가장 맛있는 고기는 이 집에서는 안 팔고…

 

한참 만에 고기를 손에 쥔 남자는 뿌듯한 얼굴로 산길 근처로 넘어갔다. 날씨가 영 좋지 않았다. 하늘이 보랏빛이었다가, 초록빛이었다가, 노란빛이었다가, 빙빙 돌았다. 이놈의 날이 미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좋은 기분에 날씨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옆 마을에서 실컷 술을 퍼마셨다. 백정이 좋은 정보를 준 덕에 아주 좋은 고기를 비싼 돈도 안들이고 샀으니 순 이익이었다. 장으로 가지 못해 생긴 손해야 목숨 값으로 치면 그만이었다. 얼른 날이 바뀌면 아내에게 돌아가 맛있는 고기를 건네줄 것이었다.

 

남자는 다시 옷깃을 여몄다. 등짐 속에서는 고깃덩이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스산한 밤이 물러가고 동이 트고 있었다. 금방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멀리 초가지붕들이 보였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걸음을 했다. 아내가 선물한 삼신이 여전히 바스락거렸다.

 

이놈의 정신머리 없는 여편네는 또 대문을 활짝 열어놨는지 문이 열려있었다. 남자는 안으로 들어가 등짐을 내려놨다. 그리고 가방 안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아내의 머리를 잡아들고 헤벌쭉 웃었다. 가장 맛있다는 고기로 사왔지. 빨리 먹자.

 

 

 

* 황인숙, 밤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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