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조명 아래에 전주가 울려 퍼진다. 넓은 무대는 어느새 무도회가 한창인 성에서 음침한 악마의 성으로 변해 있었다. 악마가 검은 옷을 입고서 무대를 장악한다. 이리저리 손짓 발짓을 하다 음악이 멈추면 그는 무대 뒤로 들어간다. 짧은 적막 후에 시작하는 음악에 맞추어 새로운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 주인공 왕자 지크프리트는 성의 창 너머로 본 백조를 찾아 무대를 뛰어다녔다. 왕자는 계속 호수로 향했다.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두리번거리는 그의 손에 들린 석궁은 소녀가 된 백조를 쏘기 위해 있는 것이었다.
포인트. 발끝으로 균형을 잡아 섰다. 곧 무언가 나올 것만 같이 은밀하게 깔리는 전주에 맞추어 부드럽게 몸을 놀렸다. 소녀는 왕자의 석궁을 보지 못한 채 그의 앞에 나설 것이었다. 무대 뒤에 서 있다 스르르 나타나는 백조, 오늘 저녁 나는 그 백조가 될 예정이다.
반짝이는 보석은 밋밋한 새하얀 드레스를 심심하지 않게 꾸며주었다. 드레스와 맞추어 주변은 깃털로 장식된 수수한 왕관을 썼다. 화장은 그간 고생한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창백하게, 하지만 소녀다운 느낌이 들도록 생기있게 하였다. 그런 모습에 더해진 푸르스름한 조명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이내 백조가 무대에 나서며 아름다운 외모로 순식간에 시선을 빼앗았다. 소녀의 이름은 오데트였다.
호수에서 헤엄치듯 무대를 거닐던 백조의 뒤편, 그늘진 곳에 있던 왕자는 결심한 듯 앞으로 나섰다. 앞에 남자가 불쑥 나타나자 놀란 듯 소녀는 멈칫했다. 곧 석궁을 눈치챈 백조는 왕자에게서 멀어진다. 멀리 떨어진 오데트는 경계하듯 두 바퀴를 돌았다. 그는 소녀가 멀어진 이유가 석궁임을 알자 석궁을 던져버렸다. 그러더니 그녀가 백조에서 사람으로 변했던 것도 잊었는지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한 발, 두 발 내딛는 모습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백조는 여전히 경계하는 듯, 품에 안겼다 밀치며 멀어지고, 다시 손을 스친다.
부드러우면서 느릿하지 않은 몸놀림이 왕자를 애태우도록 했다. 차라리 냉정하게 쳐내면 좋으련만. 빠른 날갯짓으로 날아가면 덜 하련만. 아는지 모르는지 잔망스럽게 손에 잡혔다가 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이 마치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 도망가지 말고 내게 오시오. 왕자가 속이 타는지 애원하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외면하며 소녀는 걸음을 재촉한다.
안 돼요. 나는 갈 거예요. 우리는 같이 있을 수 없어요.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당신은 누구 신가요? 나를 구해줄 그 분 인가요?
오데트는 왕자가 이해치 못할 말을 내뱉었다.
이 사람이 자신을 구해줄 것인가? 아니면 사지로 몰아넣을 것인가? 사람들 앞에 소녀를 보이며 조롱할 것인가? 불안한 생각이 오데트를 엄습한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진실로 구원할 사람인가? 과연. 글쎄. 백조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도 눈에 보이는 간절함이 어쩌면 희망을 준 것도 같다.
애틋한 추격이 시작된 지는 꽤 오래. 소녀는 그에게 잡혀주었고, 또 그는 소녀를 잡았다. 달이 비치는 호수에서 왕자가 물었다.
이름이 어찌…아, 나는 왕자 지크프리트요. 그대의 이름을 알려주겠소?
아아, 왕자님. 그렇군요. 저는 오데트랍니다.
왜 갑자기 백조에서 소녀로 변한 건지 말해줄 수 있겠소?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바닥을 바라보는 시선,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 가만히 바라보던 왕자에게 소녀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답이 아닌 질문을 던졌다.
제 말을 믿어주실 건가요?
그건…….
절 구하겠다고 약조하실 건가요?
머뭇거리는 왕자에게 쐐기를 박듯 오데트는 재차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러겠다 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지크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소. 확고한 목소리였다. 소녀는 기다렸다는 듯 사정을 털어놓았다.
저는 지금 잔혹한 악마의 저주에 걸렸답니다. 그래서 낮에는 백조, 밤에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요. 이 저주를 푸는 방법은 악마를 죽이고 진실한 사랑을 이루는 거에요.
…차라리 성으로 오는 것은 어떻…소…?
쉿.
소녀가 입가에 손을 올렸다. 잠시 후 눈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왕자는 의아한 눈으로 오데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작게 속삭였다. 그가 지켜보고 있어요. 지크프리트의 표정을 슬쩍 살핀 오데트는 왕자의 곁에서 슬슬 멀어졌다. 동시에 그 혼자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얘기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봐요, 왕자님.
오데트는 무대 뒤로 사라졌고, 왕자는 멍하니 그것을 지켜보았다.
.
.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하얀 백조의 마음에 흑심이 담겼다는 사실을 말이다. 간사하게도 오데트는 자신의 미모에 왕자가 걸려들 걸 이미 예측했던 것이다. 멍청한 왕자는 알아채지도 못한 모양이지만.
하지만 오데트. 네 마법을 풀 사람은 왕자가 아니라 바로 나야. 네 저주는 너와 나만이 풀 수 있는 거니까 말이야.
***
눈을 떴다. 앞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이는 시선 한번 피하지 않고 그대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롯이 저만 보는 눈에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공연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이건 확신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둘 사이의 거리는 이제 겨우 10cm 남짓이었다.
가만히 마주 서 있는 상대에게 손을 뻗어 볼을 어루만졌다. 차가움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래, 너는 가까이 있어도 잡질 못하는 사람이었지. 유리 너머로 비치는 사랑하는 이를 향해 웃었다. 마주 웃어주는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하얀 피부. 큰 눈에 오뚝한 콧대, 분홍빛 탐스러운 볼과 붉은 입술. 좁은 어깨에 가녀린 몸, 깔끔히 정돈된 손톱까지. 어디 하나 못나 보이지 않는다. 이 세상에 자신과 어울리는 사람은 오직 자신의 앞에 있는 한 명이리라. 입을 맞추었다. 너는 입술마저도 차갑구나. 웃음은 참 살가운데. 음. 침묵이 둘 사이에 감돌았다.
사실, 오늘은 부탁이 있어. 혹시 오데트를 아니?
그녀는 말이 없었다. 다만,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알아.' 하고 답할 뿐이었다.
있잖아, 오데트를 사랑해줄래? 왜냐면 오데트도 널 사랑할 거거든, 아가씨.
***
"분장 끝났습니다."
화장을 끝마친 걸까. 한참 얼굴을 두드리던 것들이 사라지자 듣고 싶던 말이 들려왔다. 마음의 준비를 한 후 천천히 눈을 떴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평소의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과는 다른 미모를 지닌 여자아이가 보였다. 그러곤 이해했다. 네가 오데트구나?
깔끔하게 올린 머리카락엔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없었다. 화장으로 청초해진 얼굴은 주홍빛이 돌아 수줍은 느낌을 만들어냈다. 이제 나는 내가 아닌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오데트였다. 한번 웃어 보이자 생기있는 모습이 고생 하나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창백한 눈과 아래로 쳐진 눈은 어딘가 서글퍼 보였다. 가냘픈 것이 보호본능을 일으키니, 참으로 사랑스럽지 아니한가. 나는 바람불면 날아갈 아가씨였다.
화장을 꼼꼼히 확인한 후 전신 거울 앞에 다가갔다. 다른 조연들과 똑같은 흰 드레스는 오데트의 처지를 알려주는 옷이었다. 여타 작품의 공주들은 화려한 치장을 한다. 반대로 작품의 여자주인공인 소녀는 타인과 같은 백조 신세였다. 흰 새가 아무리 어여쁘다 한들 멀리서 보면 다 똑같아 보이는 법이지 않나.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오데트의 드레스에는 약간의 보석이, 머리 장식에는 왕관이 있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그 어떤 백조보다도 아름다운 얼굴이 군계일학처럼 자신을 돋보이게 할 것이었다. 천천히 몸을 전신 거울 가까이 대었다. 보일락 말락, 입술 자국이 유리에 남아 있었다. 분명히 내가 남긴 자국이리라. 오데트는 그 위에 다시 입을 가져다 대었다.
안녕, 아가씨. 아가씨는 떠나갔지만, 오데트는 여기 있네요. 당신이 남겼던 흔적 위에 나를 남겨요. 이건 아가씨에게 보내는 행운의 입맞춤이자, 사랑의 흔적이랍니다.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
긴박한 음악과 함께 왕자와 악마는 생사를 겨루고 있었다. 격렬한 몸짓에 알맞게 상황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무대는 두 남자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발레임에도 진지한 표정연기와 아슬아슬한 결투에 절로 침이 넘어가는 거였다. 한편, 오데트는 무대의 그늘진 구석에서 왕자가 악마를 이겨내길 바라며 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악마 쪽으로 기운 듯했다. 지크프리트가 점점 악마 로트바르트에게 밀려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겁한 악마는 소녀를 공격했고 왕자가 그걸 막으려다 크게 다쳐버렸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느샌가 왕자와 악마는 거리를 두고 서로 노려보는 상태였다. 둘은 그 상태로 몇 초간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크프리트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이대로 지는 것인가? 왕자는 상처를 입은 순간부터 자신의 패배를 예상 한지 오래였다. 팔에 힘이 빠져 검 손잡이가 슬쩍 내려가자 왕자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단단히 검을 잡음과 동시에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던 왕자는 결단을 내린 얼굴을 했다.
곧 왕자가 악마를 향해 뛰어갔다. 그것을 신호로 여긴 듯 악마도 왕자에게 달려갔다. 로트바르트와 지그프리트의 거리가 가까워졌지만 왕자는 검을 휘두르지 않고 계속 달렸다. 악마는 기회로 여긴듯 공격을 가했으나 왕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악마의 품에 뛰어들었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악마가 반항 하나 못하고 뒤로 떠밀렸다. 정신을 차린 악마는 왕자를 밀쳐냈다. 무슨 짓이냐! 로트바르트의 외침에 왕자가 말했다.
죽일 수 없다면 같이 죽겠소.
악마는 지크프리트의 말뜻을 알아채었다. 이어 격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호수 쪽으로 향하려는 왕자와 벗어나려는 악마. 거칠고 빠른 박자의 음악은 관중과 무대를 압도했다. 불안한 음정이 심장박동을 부추겼다. 투닥거리며 엎치락 뒤치락하던 둘이, 곡이 갑작스레 큰 소리로 울리는 순간, 풍덩-. 호수로 빠졌다. 살아나겠다는 의지로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악마와 다르게 왕자는 악착같이 그를 아래로 이끌었다. 로트바르트는 차라리 지크프리트를 죽이고 올라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듯 순순히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오데트는 깜짝 놀라 호숫가로 뛰어갔다.
뽀그르르, 공기 방울이 아직도 두 사람이 안에서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듯 올라오고 있었다. 안에서는 아직도 몸싸움이 한창인 걸까. 그녀는 불안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무기력하게도, 오데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의 거품은 보이지 않았다. 이로써 왕자가 오데트를 만났던 호수에서, 오데트와 왕자는 헤어지게 된 것이었다.
무대는 천천히 동이 트는 무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서광이 아침을 알리고, 혼자 남은 오데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백조가 되어 자리에 남았다.
끝으로 전주가 잦아들며 무대는 막이 내렸다.
.
.
하지만 오데트, 너는 아니? 네 저주는 이제야 풀렸어. 내가 널 사랑함으로써, 네가 날 사랑함으로써. 거짓 사랑은 없는 거야. 우린 이미 키스도 한 사이잖아?
***
모든 분장을 지운 후, 나는 오데트와 이별했다. 커튼콜까지 무사히 마친 오늘의 무대를 돌이켰다. 뿌듯한 무대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누군가의 인사를 시작으로 다들 한마디씩 주고받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나 역시 발레단원들에게 수고 인사와 가벼운 포옹을 나누며 칭찬을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나온 말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뒤풀이 제의였다. 오늘은 내가 쏜다! 단장의 큰 외침에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럼 난 회!
난 치킨!
맥주!
여러 음식이 거론되며 복작복작한 분위기에 단장이 준비 다 끝난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라는 말을 전하고선 가장 먼저 나가버렸다. 이어서 부단장, 왕자, 악마…. 많은 사람이 줄줄이 나가면서 분장실은 점점 비어갔다. 나가기 전에 거울 좀 봐야겠다.
화장대에 다가가 머리를 빗는데 악마의 딸 역할을 맡았던 발레리나가 말을 걸었다.
"안 나가세요?"
"아, 저 머리 확인 좀 하고 나갈게요."
"그래요. 빨리 오세요!"
마지막으로 같이 있던 그녀까지 가버리자 분장실에는 자신만 남아 있었다. 아하, 방금 나가지 않느냐 물어본 게 그래서 였나보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빗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문을 닫기 전 한번 안을 둘러보았다. 눈이 띈 것은 거울이었다. 화장대 말고, 전신 거울.
그러고 보니 오데트에겐 인사를 하지 않았다. 거울 앞에 섰다.
여전히 남아 있는 키스 자국이, 아니, 그 위에 한번 겹친 듯한 자국이 오데트가 다녀감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거울 너머에 오데트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유리에 비친 상대를 향해 오데트로서, 또 오데트에서 벗어난 나로서 오데트이자 오데트였을 내게 말했다.
역시 무대는 완벽했어.
상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건 다 네 키스 덕분이야. 멍청한 왕자와 악마는 죽어버렸고 오데트는 저주가 풀렸거든. 아쉽다면, 진짜 끝을 아는 사람이 나 혼자 뿐이라는 거지만. 그 아이의 저주가 풀린 거 말이야. 물론 비밀은 비밀이기에 존재가치가 있는 거긴 해. 그렇지 않아? 응.
차가운 유리를 쓱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유리 위에 지문이 남았다. 손가락에 묻어난 립스틱을 비벼 없앤 뒤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뜨거운 숨 탓에 표면에 김이 서렸다.
오데트는 어때? 내 말대로 사랑스러웠지? 나도 알아. …그리고 이건 작별인사야.
소매로 립스틱 자국을 지웠다. 이젠 더는 오데트와 내 흔적을 볼 수 없겠지. 이 옷마저도 세탁해버리면 더욱이. 안녕, 오데트.
내 하루살이 사랑.
